‘일용할 양식’ 없애는 우크라 전쟁

권은중 음식 칼럼니스트

러시아는 밀의 국가로 불려왔다. 이렇게 불리게 된 것은 17세기 러시아에 편입된 우크라이나가 한몫했다. 우크라이나는 ‘유럽의 빵바구니’로 불릴 정도로 많은 밀을 생산한다. 우크라이나는 국토 대부분이 평야인 데다 비옥한 흑토로 이루어져 있다. 우크라이나는 2020년 기준 세계 7위의 밀 생산국(FAO 통계)이다.

권은중 음식 칼럼니스트

권은중 음식 칼럼니스트

하지만 러시아의 밀 생산량은 그저 광활한 대지의 은혜 때문이 아니었다. 근대 이후 서구 국가들이 이뤄낸 과학적·기술적 성취 덕분이었다. 20세기 초 스웨덴 과학자들이 멘델의 유전법칙을 밀에 적용시켜 추위에 강한 종자를 얻었다. 그래서 러시아 시베리아, 중국 북부, 캐나다에서도 겨울밀을 키울 수 있게 됐다. 그전까지 러시아는 남부 지방을 제외한 곳에서는 추위에 강한 호밀을 키웠다. 미국의 농기계, 독일의 화학비료, 프랑스의 미생물학 등도 밀의 생산량을 높였다. 옥수수와 쌀도 비슷한 과정을 거쳐 생산량이 증가했다. 그래서 20세기 말 인류 인구가 70억명이 넘어도 기아를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됐다. 배고픔으로 점철된 인류 문명의 패러다임이 20세기 과학에 힘입어 비로소 바뀐 것이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전쟁은 이 패러다임을 뒤집고 있다. 우크라이나 국토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 탓에 밀을 파종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2010년 러시아의 가뭄으로 인한 밀 수출 중단보다 더 큰 파장을 예고하고 있다. 그해 러시아의 밀 생산량 감소분은 전년 대비 33%(1400만t)였다. 그렇지만 우크라이나가 2020년 세계에 수출한 밀은 1800만t(세계 5위)에 이른다. 더욱이 밀 수출 2위 국가인 미국이 기후 위기로 올해 작황이 좋지 않다는 것도 우려 대상이다. 우크라이나가 생산하지 못한 밀을 보충하기 쉽지 않다는 이야기다.

곡물 부족으로 가장 먼저 타격을 받는 것은 가난한 나라다. 2011년 ‘아랍의 봄’으로 불리는 중동의 대규모 반정부 시위는 러시아의 곡물 수출 중단 조치 이후 터져 나왔다. 그중의 한 나라가 대규모 난민을 발생시킨 시리아였다. 시리아 내전은 10여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전쟁의 파국은 이미 시작됐다. 스리랑카가 이미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을 기다리고 있다. 반정부 시위대는 빵을 깃대에 꽂고 흔들면서 “빵을 달라”고 외쳤다. 배고픔을 못 이겨 영주에게 대항했던 중세 유럽의 농민들처럼 말이다. 파키스탄, 이집트, 아르헨티나 등의 국가 부도 우려 역시 커지고 있다.

배고픔을 강 건너 불구경 하듯 지내온 선진국들도 안심할 상황은 아니다. 농산물 가격의 폭등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코로나19로 경험했기 때문이다. 우주여행과 로봇세상을 준비하던 21세기 인류가 갑자기 중세 어둠의 시대처럼 빵 걱정을 하게 된 것이다. 이런 모습은 볼테르가 프랑스 혁명 직전 “프랑스인들이 사랑과 연극을 위해 살던 것을 갑자기 그만두고 곡식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고 말한 것을 떠올리게 한다. 인류의 ‘일용할 양식(daily bread)’을 빼앗으려는 이 전쟁이 하루빨리 끝나야 하는 이유다.


Today`s HOT
휴전 수용 소식에 박수 치는 로잔대 학생들 침수된 아레나 두 그레미우 경기장 UCLA 캠퍼스 쓰레기 치우는 인부들 호주 시드니 대학교 이-팔 맞불 시위
인도 카사라, 마른땅 위 우물 갱단 무법천지 아이티, 집 떠나는 주민들
마드리드에서 열린 국제 노동자의 날 집회 폭우로 주민 대피령 내려진 텍사스주
경찰과 충돌한 이스탄불 노동절 집회 시위대 케냐 유명 사파리 관광지 폭우로 침수 올림픽 앞둔 프랑스 노동절 시위 해리슨 튤립 축제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