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실, 이름보다 이름값이 더 중요하다

도재기 논설위원

‘국민의집’ ‘국민청사’ ‘민음청사’ ‘바른누리’ ‘이태원로22’. 윤석열 정부가 대국민 공모를 통해 선정한 대통령 집무실 명칭 후보들이다. 최종 이름은 9일까지 진행되는 국민 선호도 조사 등을 반영해 이달 중 확정된다고 한다. 확정된 이름은 용산의 대통령실 청사에 현판으로 내걸릴 것이다. 기존 ‘청와대’ 대신 한국 최고 권력, 정치의 중심 공간을 상징하는 것이다.

도재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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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건축물과 공간에 이름을 짓고 새긴 현판(편액)을 거는 문화는 역사가 깊다. 중국에서는 한나라 때 본격화됐으니 2000여년 전이다. 우리 역사에서도 삼국시대부터 등장해 조선시대에 활성화됐다. 지금 서울 도심의 조선 궁궐을 찾으면 크고 작은 건물마다에 걸린 현판을 만난다. 8월15일까지 열리고 있는 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의 특별전 ‘조선의 이상을 걸다, 궁중 현판’에서는 현판의 다양한 면모를 새삼 느낄 수 있다. 옛 건물만이 아니다. 가끔 아파트나 단독주택·오피스텔 현관문 위에 걸린 ‘○○齋(재)’ ‘○○堂(당)’ 등의 현판을 본다. 일본어에서 유래한 말이자 상업 용도의 간판과 달리 현판은 걸음을 멈추고 이름의 특별한 뜻을 생각하게 만든다.

현판 속 이름에는 용도·기능을 넘어 건물과 공간의 성격, 지향하는 뜻까지 함축돼 있다. 표음문자의 서양과 달리 표의문자인 한자 문화권에서 이름 짓기는 중대사다. 현판의 글씨나 크기, 형태도 까다롭게 신경 썼다. 공들여 이름 짓고, 정성스럽게 다듬은 현판은 건물과 공간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현판을 건물·공간의 얼굴이자 정체성의 상징으로 여기는 이유다.

절대 권력자인 왕이 거주하며 정치를 한 왕조시대 조선 궁궐의 건물들도 마찬가지다. 궁궐 내 많은 건물 중 가장 으뜸은 정전(正殿·법전)이다. 왕의 즉위식·사신 접견 등 국가 공식 행사가 열리는 곳으로 가장 웅장하다. 정전과 함께 왕이 신하들과 업무를 보는 사무공간인 편전(便殿)도 핵심 건물이다. 경복궁의 근정전·사정전, 창덕궁의 인정전·선정전, 창경궁의 명정전·문정전, 경희궁의 숭정전·자정전, 덕수궁의 중화전·덕홍전이 바로 정전과 편전이다.

국정운영의 공적 공간인 정전·편전 이름에는 다른 건물들과 달리 공통적인 글자가 들어 있다. 바로 정치를 뜻하는 ‘政’(정)자다(덕수궁은 대한제국 황궁으로 다른 궁궐과 달리 사저를 확장한 곳으로 예외다). 경복궁의 근정전(勤政殿)과 사정전(思政殿), 창덕궁의 인정전(仁政殿)과 선정전(宣政殿) 등이다. 옛 경전과 시문 등에서 차용한 정전·편전 이름은 그 의미가 철학적으로 깊고도 넓다. 그저 쉽게 요약하면 ‘근정’은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한 정치를, ‘사정’은 생각하며 정치를 하라는 뜻이다. 정전·편전 이름은 하나같이 민본정치, 왕도정치의 실현 같은 조선 왕조의 성리학적 통치 이념을 담아냈다. 봉건시대 절대 권력자임에도 그에게 요구된 정치철학이다. 또 왕 스스로 실천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요즘으로 치면 대통령의 정치적 비전과 철학을 드러내고, 국민 여론을 제대로 헤아려 똑바로 정치하라는 준엄한 촉구이자 제대로 정치하겠다는 다짐이다. 시공을 넘어 현판 속 ‘정’자는 과연 정치란 무엇인가를 끝없이 자문하게 한다.

대통령실 이름 후보작을 발표하며 정부는 모든 후보작이 국민을 강조하고 국민과의 소통이란 뜻을 함축한다고 설명했다. 급작스레 독선적으로 이뤄진 집무실 이전의 명분이 국민과의 소통이었던 만큼 어쩌면 당연하다. 더욱이 집권여당이 ‘국민의힘’인 만큼 ‘국민’이 들어간 이름이 확정될 경우 선전효과도 상당하다. 새 정부·집무실에 걸맞은 새 이름에 의미를 두는 이들도 많지만, 굳이 새 이름을 붙이느냐며 정치적 이벤트로 치부하는 이들도 있다. 예나 지금이나 이름보다 이름값이 중요한 법이다. 셰익스피어가 <로미오와 줄리엣>을 통해 말한 것처럼, 장미는 다른 이름으로 불려도 달콤한 향기가 나지 않겠는가. 그 이름이 무엇이든 국민과의 소통이라는 이름값을 제대로 하는가가 핵심이다.

조선의 왕과 권력자들은 궐내를 오가며 역사에 대한 외경심을 기반으로 현판들을 수시로 봤다. 그럼에도 선정과 폭정, 성군과 폭군이 존재했다. 윤 대통령과 정부 각료들은 대통령실 현판을 볼 때마다 그 의미를 되새기기를 바란다. 민생을 얼마나 제대로 챙기고 걸맞은 정책을 펼치는지, 국민과의 소통이 아니라 독선은 아닌지, 과연 이름값은 하고나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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