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셔널 메모리얼 파크와 아륀지

박병률 경제부장

아재 입장에서 ‘야, 이게 실화냐’며 놀라는 일이 많아졌다. 손흥민 선수가 골든부트를 들고 방긋 웃는 모습도 그랬다. 상상이나 해본 적이 있나, 한국 선수가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의 득점왕을 먹다니. 해리 케인, 쿨루셉스키 등 동료들이 그를 득점왕으로 만들기 위해 기를 쓰고 패스해주는 동료애는 더 놀라웠다. 한국 선수들은 실력이 뛰어나도 언어의 문제, 문화의 차이로 팀과 융화되기 힘들다고 생각했다. 손흥민은 이를 넘어섰다. 손흥민의 유창한 영어와 독일어가 도움이 됐겠지만, 특유의 미소와 친화력도 빼놓을 수 없다. 손흥민 때문에 동료들도 간단한 한국어는 한두 마디씩 한다고 한다. 토트넘 구단은 구단 인스타그램을 한국어로도 서비스하고 있다. 손흥민이 치르는 국가대표팀 경기도 실시간으로 전한다. 이런 위상, 마라도나나 지단을 보고 큰 세대는 상상하기 힘들다.

박병률 경제부장

박병률 경제부장

방탄소년단(BTS)은 미국 백악관에서 조 바이든 대통령을 만났다. 바이든 대통령은 야외에서 BTS를 직접 맞이하며 환대했다. 해리스 부통령, 카린 장피에르 백악관 대변인도 함박웃음을 지었다. 백악관은 BTS에게 반아시아 증오를 없애는 데 노력해달라고 부탁했다. BTS는 미국 주류로부터 인정받는 뮤지션이라고 현지 교민은 전했다.

BTS가 도착한 덜레스 국제공항에는 수천명의 아미들이 한국어 노래로 떼창을 불렀고, NBC 등 주요 방송들은 BTS 입출국을 실시간으로 중계했다. 빌보드 차트는 영어가 유창한 해외 유명 팝스타나 노는 물인 줄 알았다. 하지만 BTS는 발표하는 곡마다 빌보드 차트 정상에 올려놨다. 심지어 한국어 곡도 빌보드 싱글차트인 ‘핫100’ 정상에 올랐다. 국내 대중음악이 ‘가요톱10’을 벗어나 빌보드를 석권한다는 것, 마이클 잭슨이나 브리트니 스피어스를 보고 큰 세대는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다.

제75회 칸국제영화제에서 박찬욱 감독은 <헤어질 결심>으로 감독상을, 배우 송강호는 <브로커>로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박찬욱 감독은 한국어로 전개되는 영화를 만들었고, 송강호는 한국어로 감정선을 표현했다. 누군가는 ‘대종상 영화제’ 같다고 했다. 한국어 영화는 글로벌 영화시장에 진출하기 어려울 거라고 봤다. 오우삼 감독이나 성룡, 심지어 이연걸도 할리우드에서는 영어로 작품을 만들었다. 하지만 봉준호 감독은 아카데미영화제를 ‘로컬영화제’로 만들며 ‘1인치의 벽’을 넘어섰다. 미국 OTT인 훌루(Hulu)가 <기생충>을 독점 스트리밍한다고 트위터에 올렸을 때 한 미국 독자와 벌였던 설전은 유명하다. 한 독자가 “영어가 아니네. 상황이 어떻게 전개되는지를 이해하기 위해 자막을 읽어야 하는 영화는 누구도 보고 싶지 않을 거다”라고 남기자 훌루 측은 반박 댓글을 남겼다. “자막 보기 싫으면 한국어를 배우든가!”

손흥민의 골든부트 수상, BTS의 백악관 방문, 박찬욱 감독과 배우 송강호의 칸영화제 수상 낭보는 단 2주 새 일어난 일이다. 여기에는 공통점이 있다. 한국어가 세계무대에서 더 이상 벽이 되지 않는다는 거다. 아니, 한국어는 오히려 프리미엄을 받고 있다. 최근 동남아에는 한국 서적들이 많이 번역·출판되는데 책 표지 디자인에는 꼭 한글이 들어간다고 한다. 이 콘텐츠가 한국산이라는 걸 부각하는 것이 마케팅상 유리하기 때문이다. 과거 우리가 일본 서적을 번역해 올 때 표지에 커다랗게 히라가나를 넣었던 것과 같은 이치라고 출판사 담당자는 귀띔한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0일 국민의힘 지도부와의 오찬회동에서 용산 시민공원 이름에 대해 “영어로 ‘내셔널 메모리얼 파크’라고 하면 멋있는데 국립추모공원이라고 하면 멋이 없어서 우리나라 이름으로는 무엇으로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한 것이 화제다. 윤 대통령은 그러면서 “내셔널 메모리얼 파크’로 이름을 지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윤 대통령의 영어사랑이 사대주의에서 비롯된 것일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영어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다고도 믿고 싶지 않다. 그것보다는 ‘영어는 세련됐고, 한국어는 촌스럽다’는 구세대의 선입견이 대통령의 무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10년 전 이명박 정부도 ‘아륀지(오렌지)’를 강조했다. 당시 이명박 정부는 영어의 일상생활화가 중요하다고 했다. 어쩌면 윤 대통령의 시계는 10년 전 그때에 멈춰 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세상은 많이 변했다. ‘국립추모공원’을 외국인들도 멋이 없다고 생각할까. 참고로 지금은 ‘한리버’를 한강으로, ‘경복팰리스’를 경복궁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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