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병권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원

길은 함께 누릴 수 있을 뿐
누구도 사적으로 소유할 수 없다
혼자서는 아무리 거대해져도
함께라는 공동성이 될 수 없다
이젠 사유화와 공동성 중 택해야

을지OB베어. 서울 을지로3가에 있는 42년 역사의 생맥줏집. 내가 한 번도 들어가 본 적이 없는 곳이고, 건물주가 가게를 내쫓아 이제는 누구도 들어갈 수 없는 곳이다. 사회관계망서비스를 통해 을지OB베어의 강제 철거 소식을 접하고는 설명하기 힘든 상실감이 들었다. 이상한 말이지만 손님이었던 적이 없는 사람이 단골가게를 잃은 느낌이랄까. 심지어는 내 것이 아닌 내 무언가를 누군가에게 강탈당한 느낌마저 들었다. 도대체 이 느낌의 정체는 무엇인가. 나는 그것을 알고 싶어 무작정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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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로3가 뒷골목의 저녁 풍경은 스산했다. 건축자재와 공구를 파는 가게들은 몇 달 혹은 몇 해 전부터 셔터를 내렸고, 낡은 기둥에 묶인 전등들만이 사람 없는 골목을 힘겹게 비추고 있었다. 그런데 한 블록을 더 들어가자 완전히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마치 축제가 열린 듯 사람들이 왁자지껄했다. 오징어잡이 배처럼 가게들에는 빛이 쏟아지는 전등들이 주렁주렁 매달렸고 골목길에는 맥주잔이 놓인 테이블들이 가득했다.

그러나 이 활기에 뭔가 잘못된 것이 있었다. 여기도 만선호프인데 저기도 만선호프이고, 앞쪽에도 만선호프인데, 돌아서도 만선호프였다. 주인은 같고 간판에 적힌 숫자만 달랐다. 모두 10호까지 있고 지금 을지OB베어를 밀어내고 11호가 생겨나는 중이었다. 그런데 이 일련번호가 찍힌 가게들은 무에서 창조된 것들이 아니었다. 만선호프 열 개가 생기면서 다른 가게 열 개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사실은 더 많은 가게가 사라졌다. ‘만선 2호’가 들어선 곳에는 네 개의 가게가 있었고, ‘만선 7호’가 들어선 곳에는 다섯 개의 가게가 있었다. 그러니까 만선호프는 창조된 것이 아니라 차지한 것이다.

물론 이것이 불법은 아니다. 만선호프의 주인은 건물주들에게 더 많은 임대료를 제시하거나 스스로 건물주가 되어 가게들을 인수했다. 도대체 그는 왜 이렇게 많은 가게들을 인수하고 있는 걸까. 수십개나 되는 가게를 하나씩 인수하느니 차라리 10층짜리 가게를 하나 차리는 게 낫지 않을까. 이 골목에 서 보면 그 이유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그는 가게들을 자기 것으로 만들면서 동시에 가게에 속하지 않은 무언가를 자기 것으로 만들고 있다. 바로 골목길이다.

서울 중구청은 이 골목에 야장영업을 할 수 있도록 허가해 주었다. 길에 테이블을 내놓고 술을 팔 수 있게 해준 것이다. 그것은 이곳이 특별한 골목이기 때문이다. 2015년 서울시는 이곳을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했다. 서울시의 설명에 따르면 이곳은 “노가리와 맥주라는 우리나라 특유의 술 문화”가 생겨난 곳이다. 그리고 이 문화를 처음 시작한 곳이 을지OB베어다. 고향 황해도의 동태 맛을 잊지 못하던 강효근씨가 1980년에 생맥주 가게를 열면서 맥주 안주로 노가리를 내놓았다고 한다. 이후 이런 가게들이 하나둘씩 늘어나면서 소위 ‘노가리골목’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관청에서 이 골목에 특별한 지위를 부여한 것은 이 작은 가게들과 시민들이 일군 문화를 보존하고 발전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돈 버는 머리를 가진 사람이라면 여기에 근사한 수익모델이 있음을 놓치지 않을 것이다. 가게를 인수하면 골목길도 이용할 수 있으므로 영업장을 배로 확장할 수 있다. 게다가 이곳은 도심에서 떠들썩하게 술을 먹을 수 있는 특혜 받은 골목이다. 사람들이 모여 자연스레 축제 같은 분위기를 연출한다. 이 분위기가 더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인다. 고용하지 않았는데도 손님들이 서로를 끌어들이는 호객꾼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누구의 것인가. 만선호프가 사들인 건물에 대해서는 그것을 물을 필요가 없다. 그러나 그 건물을 사들인 이유가 되는 길에 대해서는 다르다. 길은 함께 누릴 수 있을 뿐 누구도 사적으로 소유할 수 없다. 그런데 이것을 누군가 독점하고 사적 이익을 뽑아낸다면 문제가 된다. 이는 우리의 사적 소유물은 아닌 어떤 것을 그에게 강탈당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항변할지도 모르겠다. 노가리골목에서의 야장영업은 이곳 가게들 모두에게 허가되었고, 누군가 이 가게들을 모두 인수한다면 이 골목 전체를 이용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그렇지 않다. 권리의 전제가 허물어졌기 때문이다. 이 골목에 생겨난 특별한 공동성과 여기에 부여된 권리를 혼자 차지하면 그 순간 공동성은 사라진다. 혼자서는 아무리 거대해져도 함께가 될 수 없다. 이제 서울시와 중구청이 나서 둘 중 하나를 택하게 해야 한다. 사실상 사유화된 노가리골목의 야장영업을 중지시키거나 골목길의 공동성을 살려내거나. 만약 공동성을 살려내고 싶다면 을지OB베어를 만선호프 11호의 부화장으로 삼으려는 시도를 즉각 멈추게 해야 한다. 상생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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