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징의 정치와 정치의 현실

조광희 변호사

영국도 수백 년간 ‘왕’놀이 하는데,
아직 민주주의 역사가 짧은
우리에게는 여전히 희망이 있다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필요함에
단지 속이 쓰릴 따름이다

엘리자베스2세가 보름 전 세상을 떠나고, 고희를 넘어선 찰스3세가 영국 왕이 되었다. 그 과정에서 무수한 애도와 이야깃거리가 양산되었다. 나는 영국 왕가의 이야기에 관심을 잃은 지 오래되었기에, 소셜미디어에서 어쩔 수 없이 보이는 것 외에는 거의 아무 기사도 읽지 않았다.

조광희 변호사

조광희 변호사

현대 민주주의 국가에서 ‘왕’이란 무엇일까? 세계인권선언 제1조 첫 문장은 “모든 사람은 자유로운 존재로 태어났고, 똑같은 존엄과 권리를 가진다”고 설파하고 있다. 이 선언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왕이라는 존재가 지구상에 끼어들 자리는 없다. 입헌군주제라는 어정쩡한 형식으로 살아남은 어느 가문이 현대에까지 왕가로 행세하는 걸 자연스럽다고 할 수는 없다. 논리적으로만 본다면 입헌군주국은 즉시 공화국으로 바뀌어야 한다. 그러나 인간 세계는 그렇게 논리적이지 않다. 많은 이들이 ‘왕’이라는 환상을 둘러싸고 상징적 놀이를 하는 것을 즐거워한다. 상징적 놀이가 대중에게 주는 희로애락의 체험에 비한다면, 사람들이 왕가에 부담하는 세금은 매우 가벼운 것일 수도 있다. 넷플릭스 구독을 통하여 드라마를 즐기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 차이는 있다. 우리는 넷플릭스의 드라마가 허구라는 것을 알면서 기꺼이 즐기는데, ‘왕’ 놀이는 진심으로 믿는 사람들이 많다.

먼 길을 떠난 여왕은 역할을 너무 잘 수행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현실과 환상의 분열을 깨닫지 못하게 할 정도였다. 찰스3세는 어떨까. 며칠 전 어떤 문서에 서명하면서 보인 짜증은 그가 보잘것없는 인품의 소유자라는 의심을 더 강하게 불러일으켰다. 아무튼 영국인들이 나름의 역사 속에서 자신들의 감정을 이입하고, 그 역할극을 정치적·사회적 문화로 즐기는 것을 탓할 이유는 없다. 다만 나는 그런 소동극을 같이 즐길 생각이 없다. 나는 심슨 부인을 위해 왕위를 버린 에드워드8세나, 평민과 결혼한 일본의 마코 전 공주에게 관심이 간다. 그다지 어렵지 않다는 미국변호사 시험에 계속 떨어지고 있는 그의 남편이 다음에는 꼭 합격하여 마코의 체면을 살려주면 좋겠다.

입헌군주제가 아닌 이 민주공화국의 나날은 안녕한가? 요 며칠 새 ‘XX’라는 비속어가 가장 중요한 정치 현안이니만큼, 영국보다 못하면 못했지 나을 게 없다. ‘왕’ 놀이에 관심이 없다고 일갈하기에는 민망한 상황이다.

오래전에는 권력과 정치의 세계에 좋든 나쁘든 어딘지 모를 아우라가 있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권력을 비밀리에 다루는 예외적인 인물들의 세계’라는 환상이 그것이다. 이제 우리는 그 세계가 일종의 변형된 ‘쇼 비즈니스’라는 것을 다 알게 되었다. 안에서는 더 많은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온갖 사기와 협잡이 범람하는데, 밖에서는 시민을 위해 헌신한다는 역할극을 수행하는 배우로 살아간다.

매체의 발달이 정치의 뒷골목을 샅샅이 보여주자, 나라와 국민을 위해 거창한 일을 다루는 그들이 더러는 우리보다 훨씬 천박하다는 것이 온 세상에 드러났다. ‘XX’라는 말, 쓸 수 있는 말이다. 아주 가까운 친구들끼리는 말이다. 약간의 품위만 있어도 함부로 쓰지 않는다. 그런 말을 쓴 적이 없다는데 전후 사정을 보면 별로 안 믿어진다. 평소의 언행을 보면 오히려 수긍이 간다. 그리고 이번에 그 말을 뱉었는지, 안 뱉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어차피 그렇게 말할 만한 인물이라고 모두가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바라는 이상적인 정치가의 기준으로 보면, 현실의 정치인은 하나같이 낯 뜨거운 도둑놈과 비열한 사기꾼이다. 그러나 인간의 본질은 원래 비루하고 야비하고 권력을 탐한다. 여의도는 그런 특성이 두드러진 사람들이 모인 곳이다. 공적 목표에 헌신하는 이상적 인간을 기대하는 국민이라면 백발백중 혐오하게 된다. 그나마 이 현실에서 우리가 염원할 수 있는 가장 바람직한 인물은, 이상을 잃지 않으면서도 인간군상의 그런 모습을 이해하고, 그들과 더러는 협력하고 더러는 싸우면서 현실적인 결과를 이끌어내는 정치인이다. 정치와 정치인을 신봉하지도 말고, 증오하지도 말아야 한다. 신비화하지도 말고, 모멸하지도 말아야 한다. 정치는 직업 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것인데, 그렇다고 메시아를 기대해서도 안 된다. 민주주의의 오랜 전통이 있는 나라도 정색을 하고 수백 년간 ‘왕’ 놀이를 하는데, 아직 민주주의 역사가 짧은 우리에게는 여전히 희망이 있다.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필요하다는 것에 속이 쓰릴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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