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리는 세계의 분할 통치

박구용 전남대·광주시민자유대학 교수

‘보이는 세계’는 각자에게 달라도
‘들리는 세계’는 대부분 비슷하다

그런데 여권은 ‘들리는 세계’를
7 대 3으로 분할하고 있다
그것은 자유가 아니라 국민 억압

‘보이는 세계’와 ‘들리는 세계’가 뒤틀린다. 첫 유엔 연설, 대통령의 말이 들린다. 그의 말소리는 우리나라의 국제적 위상에 부합하듯 위엄이 있다. 어느 순간 불쑥 대통령 부인이 보인다. 지휘하고 응원하고 평가하는 모습이다. 혼란스럽다. 퍼스트 레이디인가, 퍼스트 퍼슨인가?

박구용 전남대·광주시민자유대학 교수

박구용 전남대·광주시민자유대학 교수

말하는 사람이 퍼스트 퍼슨이다. 언제나 그랬다. 부처, 공자, 예수, 소크라테스는 모두 말하는 사람이다. 이들의 말소리는 로고스(logos)다. 합리적 이성의 소리다. 철인, 성인 못지않게 정치 지도자의 말도 힘이 세다. 특히 최고 권력자의 말은 자체로 법적 근거를 갖는다. 말이 권위고 권력이다. 그만큼 무겁고 무서운 것이 대통령의 말이다.

프랑스 철학자 데리다는 말-중심주의 해체를 시도했다. 그는 말소리보다 그 말이 가능하기 위한 전제에 주목한다. 전제 없는 말의 불가능성을 밝히면서 말소리 주체의 권력을 해체하는 전략이다. 말의 주인은 그 말의 실제 주인이 아니다. 그래도 말하는 사람이 현실 권력자다. 말하는 사람의 배후에 지휘자가 있다손 치더라도 그(녀)는 보이지 않도록 탈-영토화되어 있어야 한다. ‘보이는 세계’에 지휘자가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카오스의 문이 열린다.

‘들리는 세계’의 말하는 자와 ‘보이는 세계’의 지휘자는 한 몸이어야 한다. 두 세계의 주체가 분열되면 나라가 위태롭다. 증후는 나라 밖에서 감지된다. 유엔에서 대통령은 홀로 최고 권력자가 아니다. 말하는 자이면서 들어야 하는 자이다.

대통령의 연설문을 몇 번 읽는다. 짧고 쉽다. 그리고 비어 있다. ‘약자복지의 글로벌 버전’이란다. 약자복지란 말부터 기이하다. 복지를 약자 혜택으로 이해하는 개념 자체가 부도덕한 거짓이다. 세계 대부분의 나라에서 사회복지의 수혜는 빈부 차이와 무관하다. 소득기준으로 상위 30%나 중위 40%가 하위 30%보다 더 큰 복지혜택을 받는 경우가 태반이다. 말은 틀렸지만 ODA(정부개발원조) 예산을 늘린 것은 자랑할 만하다.

‘자유와 연대: 전환기의 해법’이 이번 연설의 제목이다. 21번 자유를 말한다. 유엔 역사상 기록이다. 대통령이 생각하는 자유의 참뜻을 가늠할 만한 문장은 하나다. “진정한 자유와 평화는 질병과 기아로부터의 자유, 문맹으로부터의 자유, 에너지와 문화의 결핍으로부터의 자유를 통해 실현될 수 있습니다.” 이 맥락에서 자유는 복지의 다른 이름이다. 앞의 두 자유는 최소복지인 공적 부조에 해당하며, 문화에서 자유는 사회서비스 영역이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광활한 지평은 외면하고 오직 최소복지와 중첩되는 매우 협소한 자유를 왜 이토록 자주 많이 언급하는 것일까? <자유 진영의 글로벌 연대>를 통한 신냉전 구축이 대세라고 판단한 것일까?

우크라이나 전쟁, 미·중 무역갈등, 공급망의 블록화 체계구축을 근거로 신냉전 운운하는 지식인들이 많다. 부분적으로 타당하니 그 부작용을 알고 대비하는 것은 대통령과 정부의 주된 업무다. 그렇다고 이 흐름에 슬며시 올라타서 자신들의 낡은 이데올로기를 선전하는 것은 못난 짓이고 위험한 처사다. 헛발질 안 하려면 조 바이든의 입장부터 확인하고 또 확인해야 한다.

바이든은 지난해 첫 유엔 연설에서 분명하게 신냉전이나 경직된 블록화를 추구하지 않는다고 다짐했다. 올해 연설에서도 미·중관계를 거론하며 다시 한 번 강조한다. “우리는 냉전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떤 국가에도 미국이나 다른 파트너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요구하지 않습니다.”

바이든은 세계를 이끌어갈 나라의 자유에 대해 조금 낯선 말을 한다. “이 나라는 LGBTQ 커뮤니티에 속하는 개인들이 폭력의 표적이 되지 않고 자유롭게 살고 사랑하는 곳, 시민들이 보복의 두려움 없이 지도자들에게 질문하고 비판할 수 있는 곳이다.” 우리나라는 세계 최고의 민주주의 국가다. 최근에 그랬고 앞으로도 그래야 한다. 그런데 세계시민을 호명하는 대통령이 비판은 물론이고 자기가 한 말이 ‘들리는 세계’조차 공권력으로 통제하려 든다.

같은 장소에서도 ‘보이는 세계’는 각자에게 다르다. 시각이 주체성 감각인 까닭이다. 반면 청각은 공동체 감각이다. 같은 장소에 있는 사람들에게 ‘들리는 세계’는 대부분 비슷하다. 한 가족, 한 나라에서 ‘들리는 세계’는 하나로 중첩된다. 그런데 지금 대통령과 여당은 ‘들리는 세계’를 7 대 3으로 분할하고 있다. 분할 통치는 자유가 아니라 국민 억압이다.


Today`s HOT
보랏빛 꽃향기~ 일본 등나무 축제 연방대법원 앞 트럼프 비난 시위 러시아 전승기념일 리허설 행진 친팔레스타인 시위 하는 에모리대 학생들
중국 선저우 18호 우주비행사 뉴올리언스 재즈 페스티벌 개막
아르메니아 대학살 109주년 파리 뇌 연구소 앞 동물실험 반대 시위
최정, 통산 468호 홈런 신기록! 케냐 나이로비 폭우로 홍수 기마경찰과 대치한 택사스대 학생들 앤잭데이 행진하는 호주 노병들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