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 청년들의 재난 서사

김선영 TV평론가
[김선영의 드라마토피아] 우리 시대 청년들의 재난 서사

단막극의 계절이 돌아왔다. 지상파 유일의 단막극 시리즈 ‘KBS 드라마 스페셜’이 지난달 16일, <얼룩>을 시작으로 축제의 문을 열었다. 지난해 영화 프로젝트인 ‘TV시네마’ 부문을 신설해 그 방영작들이 국제상을 받는 등 인상적인 성과를 거둔 ‘KBS 드라마 스페셜’은 올해도 주중 프라임타임대 방영이라는 파격 편성으로 한층 공을 들인 모양새다.

김선영 TV평론가

김선영 TV평론가

신선함과 다양함으로 무장한 단막극은 방송 생태계의 균형 발전을 위해서도 필요하지만, 그 해의 시대정신과 핵심 키워드를 엿볼 수 있는 텍스트라는 점에서도 중요한 의의가 있다. ‘KBS 드라마 스페셜’이 최근 3년간 다룬 소재만 보더라도 학교폭력, 노인 빈곤, 아동학대, 소년범죄, 고독사, 성차별 등 근래 한국을 뒤흔든 여러 사회문제를 포함하고 있다.

‘KBS 드라마 스페셜 2022’ 역시 코로나19 팬데믹, 디지털성범죄, 군대 부조리와 같은 다양한 사회 이슈에 관한 이야기를 예고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대표적인 키워드는 바로 ‘청년’이다. 방영에 앞서 열린 제작발표회에서 먼저 소개된 <얼룩> <방종·사진> <프리즘> <열아홉 해달들>, 이 네 편의 작품 모두 장르는 달라도 공통적으로 우리 시대 청년들의 현실을 다루고 있다.

특히 첫 번째 방영작 <얼룩>과 두 번째 방영작 <방종>은 각각 전통적인 서스펜스와 블랙코미디 활극이라는 상반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전망 없는 청년들의 자화상 연작처럼 보일 정도다. 두 작품은 심지어 결말마저 유사하다. 시대의 다양한 목소리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이를 다채로운 서사로 들려주는 단막극의 초점이 이렇게까지 한곳에 몰린 이유는 그만큼 우리 사회 청년 문제가 심각하다는 방증일 것이다. 청년층의 어두운 현실을 각기 다른 상상력으로 표현한 <얼룩>과 <방종> 모두 결말에서는 극단적 파국 외의 엔딩신을 상상하지 못했을 정도다.

<얼룩>과 <방종>에서 제일 두드러지는 것은 청년들의 경제적 절망이다. 먼저 <얼룩>은 가난한 음대생이 유학을 통해 ‘탈조선’을 꿈꾸다 좌절하는 이야기를 그린다. 공지훈(차학연)은 빈곤한 상황에서도 피아노를 포기하지 못하는 청년이다. 과거의 청춘드라마에서라면 천부적 재능과 노력으로 가난을 극복하고 피아니스트의 꿈을 이루는 낭만적 성장담이 펼쳐졌겠지만, 21세기 대한민국의 현실이 투영된 지훈은 지도교수로부터 ‘가난이 곧 재능은 아니니, 본인이 확실한 투자상품이라는 걸 증명하라’는 핀잔이나 듣는다. 동기와 후배들은 학비와 생활비를 버느라 레슨비 마련은커녕 학교 연습실도 빠듯하게 사용하는 지훈을 대놓고 “거지새끼”라 부르며 경멸한다. 유학에 집착하다가 스스로도 감당할 수 없는 범죄의 길로 빠져드는 지훈에게, 드라마는 끝까지 한 톨의 희망도 허용하지 않는다.

<방종>의 주인공 오병훈(김기해)의 현실도 ‘노답’이긴 마찬가지다. 통계학을 전공한 그는 배달대행업체에서 일하면서 ‘시드머니’를 마련해 코인에 투자해 ‘한방’을 노리는 ‘영끌족’이다. 본인의 명석한 두뇌와 체계적인 전략을 통해 성공을 자신했던 병훈은, 그러나 유튜버의 말을 믿고 투자에 ‘올인’했다가 애써 모은 돈을 다 날려버린다. 드라마는 우울한 병훈이 한 인터넷 커뮤니티에 빠지게 되고 곧 ‘신’으로 추앙받으면서 ‘온라인 범죄’를 저격하는 활극으로 선회하지만, 그 근본적인 출발점에는 청년층의 좌절이 있음을 강조한다. 판타지 활극처럼 시작한 드라마는 갈수록 광기에 젖어가는 병훈의 모습과 함께 미스터리 스릴러로 변해간다.

오랜 경제 침체로 인해 상시화된 취업난에 시달리던 청년들의 위기는 코로나19 팬데믹 시대를 통과하면서 더욱 악화되었고, 이 같은 현실은 자살률, 고독사 증가 등 각종 통계에서도 드러나고 있는 상황이다. 최근 전경련에서 내놓은 보고서에서도 청년층의 체감경제고통지수가 전 연령대 중 가장 높다는 결과가 나왔다. 청년층을 일컫는 신조어의 변화에서도 위기의 심화가 나타난다. ‘삼포세대’에서 ‘n포세대’를 거친 오늘의 청년들은 이제 스스로를 ‘코로나 세대’라 부른다. 청년들의 현실이 급기야 재난과 동의어가 된 것이다.

실제로 <얼룩>과 <방종>에서 주인공들이 잔혹한 파국을 맞이하는 결말은 영화 <기생충>에 버금가는 재난드라마 엔딩신 그 자체다. ‘KBS 드라마 스페셜 2022’는 청년서사가 낭만적인 성장드라마에서 재난서사로 변해가는 과정의 단적인 예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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