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사람이냐”

고병권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원

여권도 서울시도 교통공사도
장애인들을 톡톡 건드린다

‘권리 향한 투쟁 포기 않겠다’
장애인들 시위는 그 답변이다
사람이길 시민이길 포기 못하기에

고병권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원

고병권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원

1월2일 아침의 서울 삼각지역.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의 박경석 대표는 기자들 앞에서 출근길 선전전을 재개하는 이유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장애인도 시민이지만 장애인에게는 기본적인 시민권, 즉 이동하고 교육받고 노동하고 지역에서 살아가는 권리조차 보장되어 있지 않다고 했다. 오세훈 서울시장이 국회예산 상황을 지켜보자며 휴전을 제안해서 출근길 탑승 시위를 중단했으나 결국 전장연의 예산 요구는 완전히 무시되었다고 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지난달 법원이 내놓은 강제조정안을 받아들이겠다고 했다. 사실상 열차 연착 시위를 불허한 조정안이지만 이를 받아들여 앞으로는 연착을 유발하지 않는 시위 방식을 택하겠다고 했다.

내용도 많지 않았고 목소리도 차분했다. 하지만 기자회견 시간이 생각보다 길어졌다. 삼각지역장이 20~30초마다 한 번씩 방송을 했기 때문이다. 그는 ‘고성방가’ 등 소란을 피우는 행위 등이 철도안전법에 금지돼 있다는 내용의 안내문을 수십 차례 읽어나갔다. 그는 박경석 대표를 지켜보다 박 대표가 말을 꺼내면 곧바로 확성기를 들어 목소리를 지우는 방송을 시작했다. 그런 식으로 기자회견 내내 박 대표의 목소리가 전달될 수 없도록 방해했다.

그는 사람을 모욕하고 있었다. 상부에서 어떤 지시를 받은 건지, 스스로 어떤 오기 내지 충동에 휩싸였던 건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것은 수십년간 이 사회에서 묵음처리당한 사람이 내는 간절한 목소리에 대고 할 수 있는 행동은 아니었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고 느꼈을 때 나는 제발 그러지 말라는 표정을 지으며 손을 내저었다. 그가 안타까웠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스스로에 대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사람 같았다.

기자회견이 끝나자 장애인들이 두세 사람씩 탑승구에 섰다. 그러나 탑승할 수는 없었다. 열차들이 수없이 들어왔고 객실 문도 수없이 열렸지만, 카프카의 단편 속 시골사람처럼 장애인들은 열려있는 문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내 앞에 있던 보안요원은 뒤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외쳤다. “일반승객분들 계세요? 지하철 타려는 시민분들 계세요?” 그는 비장애인 승객들만을 들여보냈다. 장애인들은 ‘일반승객분들’과 ‘시민분들’이 들어가는 모습을 그 자리에서 13시간 동안이나 지켜보았다. 한 노인이 지하철을 타다가 고개를 홱 돌려 소리쳤다. “너희가 사람이냐.” 그렇지 않아도 탑승구에 놓여 있는 돌덩이 취급받던 장애인들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 데 성공한 그는 훈장이라도 달라는 듯 득의양양하게 객실로 들어갔다.

삼각지역의 장애인들은 돌덩이처럼 묶여 있던 사람인가, 사람 모양으로 놓여있던 돌덩이인가. 노인처럼 소리를 내지르지는 않았지만 정부 당국자들도 이들이 사람인지 툭툭 건드려본 점에서는 다르지 않았다. 이번 정부 예산부터 그랬다. 전장연은 장애인 기본권 확보를 위해 최소 1조3000억원의 예산이 증액되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지난 1년간 지하철 시위의 핵심 요구 사항이었다. 장애인 관련 예산이 OECD 평균의 3분의 1도 안 되는 나라에서 이 정도의 증액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국회 예산 심의 과정에서 절반이 날아갔다. 여야는 국회상임위에서 6000억원가량을 증액하는 데 합의했다. 황당한 일은 그다음에 일어났다. 기재부가 이 증액안을 거부한 것이다. 보통의 경우 정부는 국회에 읍소해서 예산을 조금이라도 더 타내려고 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국회가 늘려준 장애인 관련 예산을 정부가 나서서 거부해버렸다. 이렇게 해서 1조3000억원은 6000억원이 되었고, 6000억원은 100억원이 되었다.

정부가 지하철 탑승시위를 벌인 장애인들을 조롱한 셈이다. 정부로서는 장애인 예산을 늘려줄 마음이 티끌만큼도 없으니 해볼 테면 해보라는 메시지였다. 여당의 원내대표는 한 술 더 떴다. 그는 장애인 관련 예산이 “무려 106억이나 반영되었다”며 “시민들의 인내심을 시험하지 말라”고 했다. 앞말은 1조3000억원을 요구한 ‘너희가 사람이냐’는 말을 에둘러 한 것이고, 뒷말은 ‘나는 너희를 시민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을 에둘러 한 것이다. 오세훈 시장은 법원의 강제조정안마저 거부하며 판사를 겨냥해 “너무 무르다”고 했다. 그렇다면 돌덩어리처럼 탑승구에서 종일 열차를 기다리던 장애인들에게 망치라도 휘둘러야 한다는 말인가. 서울교통공사는 시민들에게 재난안전문자까지 발송했다. 삼각지역 탑승구에 무슨 폭발물이 놓여있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장애인들을 계속해서 톡톡 건드려보는 것이다. 너희가 사람이냐.

장애인들의 시위는 그것에 대한 답변이다. “전장연은 권리를 향한 투쟁을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맞는 말이다. 정초부터 사람이기를, 시민이기를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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