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과 걸림돌

최성용 청년연구자

독일에는 ‘걸림돌’이 있다. 독일의 예술가 군터 뎀니히는 1995년부터 나치 시대 강제수용소로 이송된 희생자들의 마지막 거주지나 일터였던 장소 앞 인도 바닥에 10×10㎝ 크기의 추모 동판 표지석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걸림돌에는 희생자의 이름, 생년월일, 이송날짜, 사망 장소 및 사망일, 사망 이유가 새겨져 있고, 유대인, 집시, 사회주의자, 노동조합원, 동성애자 등 나치에 박해당했던 희생자라면 누구든지 걸림돌에 새겨졌다. 일상 곳곳에 설치된 걸림돌은 나치의 전쟁범죄를 묵인했던 다수의 독인인들이 공범이었음을 드러내고 있다.

최성용 청년연구자

최성용 청년연구자

이 프로젝트는 아래로부터의 기억운동이 되어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는데, 한국에도 ‘위안부’ 피해자나 강제동원 피해자를 기리는 ‘평화디딤돌’이 설치되었다.

물론 반발도 적지 않았다. 극우단체들의 훼손과 협박, 집값 떨어진다는 논리 등이 프로젝트를 방해하곤 했다. 사실 과거의 폭력과 과오를 기억하려는 시도는 그 자체로 지배세력과 그에 동조하는 사람들에게 ‘걸림돌’이 된다. 어떻게든 치워버리고 싶은 불편한 걸림돌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 현대사는 무수한 ‘기억의 걸림돌’로 가득하다. 지난 2월18일은 343명의 인명 피해를 일으킨 대구 지하철 참사 20주년이었다. 유가족들은 20년 전의 기억을 여전히 가슴에 품고 살아가지만, 그들에게 정작 ‘추모’라는 단어조차 허용되지 않고 있다. 유가족들은 추모공원 조성을 요구했지만 인근 상인들은 ‘혐오시설’이라며 반대했고, 무책임한 태도로 일관했던 대구시는 추모라는 단어를 도려낸 채 ‘대구시민안전테마파크’를 조성했다. 추모라는 이름의 걸림돌을 도저히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다음날인 2월19일, 5·18민주화운동부상자회 및 공로자회가 특전사 동지회와 함께 국립5·18민주묘지를 참배하며 ‘대국민 공동선언’을 내놓았다. 그들은 5월 광주의 ‘당사자’로서 ‘또 하나의 피해자’인 특전사에 대한 ‘화해와 용서’를 주장했다. 그러나 제대로 된 사과와 밝혀지지 않은 진실에 대한 증언이 결여된 채, 군복을 입고 ‘기습적으로’ 진행된 특전사 동지회의 참배는 지역사회의 공분을 일으키고 있다. 이때 ‘화해와 용서’는 불편하게 가해를 추궁하는 기억의 걸림돌을 치우고자 하는 위장된 언어에 지나지 않는다.

지난 3월6일, 윤석열 정부는 ‘강제동원 피해자 문제에 대한 해법’을 제시했다. 일본마저 호응하지 않는 윤 정부의 ‘해법’은 외교 참사 수준이지만, 그럼에도 한·일 안보 협력을 강화하기 위해 윤 정부는 일제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주장하는 강제동원 피해자와 그 운동을 어떻게든 치워야 할 ‘걸림돌’로 보고 있다.

2015년 ‘한·일 위안부 문제 관련 합의’에서도 동일하게 ‘위안부’ 피해자들과 그 운동은 한·미·일 안보 협력의 치워야 할 ‘걸림돌’이었다.

국가, 정부, 군대 같은 ‘거대한 행위자’ 앞에서 고작 걸림돌이 무슨 힘이 있을까? 걸림돌은 너무나 미약하고 ‘작은 행위자’에 불과해 보인다. 그러나 뒤집어 생각하면, 걸림돌을 치우려는 거대한 행위자의 노력은 역설적으로 아무리 작고 힘없는 피해자라 해도 무시할 수 없다는 걸 뜻한다. 너무나 불편하고 방해되는 걸림돌이기에 어떻게든 치워버리려 하는 것이다.

그렇게 ‘작은 걸림돌’은 세상을 바꾸기도 한다. 지난 2월7일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피해자 배상 청구소송 1심 판결에서, 법원은 원고 피해자의 손을 들어주었다. 한국 정부가 학살 사실을 부인하며 항소하자, 3월10일 베트남 외교부는 승전국으로서 사과를 원하지 않는다는 그간의 태도를 뒤집고 역사적 진실을 강조하며 학살 사실을 부인하는 한국 정부에 유감을 표했다. 이는 베트남전 학살 피해자들과 가해자로서 그들에게 연대해 온 한국의 운동의 성과이며, ‘작은 걸림돌’이 얼마나 큰일을 해낼 수 있는지 알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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