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무직 1인분의 밥값

유정훈 변호사

콜린 파월 전 미국 국무장관이 레이건 행정부의 국방장관 보좌관으로 재직하던 때의 일이다. 1983년 7월 어느 날 아침 국방부 관련 언론 보도를 살피는데, 워싱턴포스트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해군 병원에서 총상 치료에 관한 연구를 위해 개를 마취시켜 총으로 쏜 후 실험 대상으로 삼는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큰일났다’고 직감했다. 그 무렵 미사일 배치 문제가 이슈가 되어 있어, 국방장관 캐스퍼 와인버거는 하필 당일 주요 방송사 3곳과 인터뷰가 잡혀 있었다.

유정훈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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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버거가 출근했고, 첫마디는 당연히 “대체 이 개한테 총 쏘고 어쩌고 했다는 게 무슨 얘기야?”였다. 직업군인 파월은 “장관님, 전시에는 말입니다…”라며 실험에 관해 설명하려 했지만, 닉슨, 포드, 레이건 행정부에서 모두 장관급 직위를 역임했던 와인버거는 듣지도 않았다. “장관의 명령으로 즉각 폐지라고 해군에 전달하게. 그 프로그램은 끝이고, 재고할 여지도 없어. 내 말 알겠나?”

와인버거는 예정대로 방송에 출연했고, 첫 질문은 당연히 미사일이 아니라 개 실험 얘기였다. 그는 딱 잘라 말했다.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혹시 그런 프로그램이 있다 하더라도 즉시 폐지하라고 이미 명령했다.” 나아가 군이 동물을 총상 실험 대상으로 삼는 일은 어떤 이유라도 없다고 단언했다. 언론은 그의 대응을 긍정적으로 평가했고, 개 실험은 더 이상 이슈가 되지 않았다.

이 에피소드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와인버거라는 인물 혹은 그의 대응 자체보다, 이를 통해 파월이 얻은 통찰이다. 그는 장관이 사실관계 확인이나 의사 결정에 도움을 받겠다며 군 관계자, 의사, 수의사, 동물권 운동가 등으로 위원회를 구성하지 않고, 이유나 근거가 무엇이든 개를 사랑하는 국민들에게 어떤 설명도 먹히지 않는다는 것을 간파하고 즉시 그 프로그램을 폐지했다는 점에 주목했다. ‘미디어 대응의 대가’인 자신의 상관으로부터, 세상에는 논리를 떠나 건드리면 곤란한 문제가 있는데 혹시 그런 이슈를 건드렸다 해도 신속하게 정면 대응하면 그로 인한 부담을 오히려 부채 항목에서 자산 항목으로 옮길 수 있다는 교훈을 얻었다고 파월은 회고록에 썼다.

언제부터인지 정치인이나 고위 공직자에게 어떤 사안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면 돌아오는 답변이 똑같아졌다. 정부가 이태원 참사에 대응하고 수습하는 과정에서 왜 그렇게 했는지 의문을 제기해도, 대부분의 국민은 평생 만져볼 일이 없는 고액의 가상자산 투자를 한 국회의원에게 문제를 제기해도, 답변은 동일하다. “위법은 없었다” 아니면 “적법하다”.

하지만 ‘적법하다’는 ‘괜찮다’ 또는 ‘해도 된다’와 같은 뜻이 아니다. ‘바람직하다’ 혹은 ‘공공의 이익에 부합한다’와도 다른 차원의 판단이다. 국가와 사회의 중요한 사안에 대한 결정을 특정한 법조문을 위반해 법적 책임이 생기는지 여부를 따지는 법적 판단으로 좁히면 곤란하다. 예를 들어, 무죄 추정은 중요한 헌법상 원칙이지만, 형사절차에 적용되는 문제이지 정책 결정이나 정무적 판단, 표를 던지는 유권자의 의사 결정과는 무관하다.

무엇보다 국민들이 궁금해하는 점은 적법성 여부가 아니다. 설마 국회의원의 가상자산 투자 자체가 위법하다고 생각해서 질문을 하고 있을까. 공직자나 정치인은 적법한 행위 중 공공의 이익에 가장 부합하는 결정을 하라고 국민으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은 존재다.

위법행위를 하면 당연히 실격이므로, 그들의 어떤 행동이 ‘적법하다’는 해명에는 의미 있는 정보값이 거의 없다. 적법의 방패막으로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려다 오히려 논란에 땔감만 제공하는 경우가 늘어날 뿐이다.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국민의 눈높이에 맞는 답변을 해서 곧바로 이슈 자체를 수습한 사례가 어떤 것이 있는지, 정치인이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 대응을 한 경우가 언제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정무직 공직자는 “적법하다” “절차상 문제없다” “원칙에 맞게 하겠다”, 이런 얘기를 하면 안 된다. 이건 기본일 뿐만 아니라, 그런 자리까지 가기 전에 공적 조직의 아래 단계에서 직업 관료가 이미 다 해결하는 문제다. 그 너머의 판단과 결정을 하기 위해 정무직이 있고, 그런 직무를 수행하라고 상당수의 보좌관을 붙여주는 등 경력직 공무원에게는 없는 지원을 해주는 것이다. 국민들의 요구는 그리 대단하지 않다. 보통 사람들은 직급이 올라가고 직위가 바뀌면 그에 부합하는 역할을 하기 위해 애쓴다. 관리자가 되었는데 실무자 때 하던 행동과 판단을 계속하고 있으면 자리를 잃으니까. 마찬가지로 정치인이나 고위 공직자들도 1인분의 밥값은 해주길 기대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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