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1일 의료개혁과 관련해 대국민 담화를 했다. 2022년 이태원 참사, 지난해 부산 엑스포 유치 실패에 이은 세 번째 담화였다. 관심은 ‘의대 정원 2000명 증원’ 변화 여부에 쏠렸다. 여당인 국민의힘 내에서도 유연한 대응을 요구해온 터다.
윤 대통령은 “근거도 없이 힘의 논리로 중단하거나 멈출 수는 없다”고 말했다. 전공의들을 향해선 “증원에 반대하는 이유가 장래 수입 감소를 걱정하는 것이냐”고 몰아세웠다. “의료계가 더 타당하고 합리적인 방안을 가져온다면 논의할 수 있다”며 여지를 뒀지만, 방점은 ‘2000명 고수’ 쪽에 찍혔다고 봐야 한다.
기자들과의 질의응답 없는 ‘원맨쇼’는 윤 대통령의 통치·소통 방식을 드러내는 ‘쇼케이스’였다. 사자성어로 분석해봤다.
① 우이독경(牛耳讀經·가르치고 일러줘도 알아듣지 못함)
윤 대통령은 담화 내용 대부분을 의료개혁 추진 근거와 당위성을 설파하는 데 할애했다. △‘2000명’은 정부가 꼼꼼하게 계산해 산출한 최소한의 증원 규모이며 △한국은 외국과 비교해 의사 수가 크게 부족하고 △증원 규모를 결정하기까지 의사단체 등 의료계와 충분히 논의했다고 강조했다.
윤 대통령은 사안의 핵심을 이해하지 못했거나 외면했다. 지금 시민은 2000명이 결정된 과정엔 별 관심이 없다. 당장 나와 내 가족이 아플 때 신속하게, 제대로 치료받을 수 있을지 궁금하고 불안할 뿐이다. 정부가 안심할 만한 해법을 내주길 바랄 뿐이다. 윤 대통령은 딴 소리만 했다.
② 일방통행(一方通行·한쪽의 의사만이 행세하거나 통하는 일)
역대 대통령들의 대국민 담화는 짧은 입장표명으로 끝나는 게 관행이었다. 윤 대통령의 담화는 이례적으로 길었다. 그는 51분 동안 대통령실 브리핑룸에 선 채 1만자 넘는 문안을 읽어내려갔다. 대언론 브리핑을 위해 만들어진 브리핑룸에 출입기자들은 들어가지 못했다. 이관섭 비서실장을 비롯한 대통령실 참모들만 배석했다.
딱히 놀랄 일은 아니다. 윤 대통령은 지난해도 올해도 신년 기자회견을 건너 뛰었다. 지난해엔 조선일보 인터뷰로, 올해는 KBS 녹화 대담으로 대신했다. 소통의 상징으로 자랑하던 도어스테핑(출근길 문답)은 ‘바이든-날리면’ 사건 이후 중단된 채 재개되지 않고 있다. 윤 대통령은 민주화 이후 대통령들이 국민과의 소통을 위해 지켜오던 관행을 무너뜨리고 있다.
③ 견강부회(牽强附會·이치에 안 맞는 말을 억지로 끌어 붙임)
윤 대통령은 “제가 정치적 득실을 따질 줄 몰라서 (의료)개혁을 추진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역대 어느 정부도 정치적 유불리 셈법으로 해결하지 못한 채 이렇게 방치되어, 지금처럼 절박한 상황까지 온 것”이라며 “이것이 바로, 민주주의의 위기”라고도 했다.
‘민주주의’를 아무런 맥락 없이 편의적으로 동원해선 곤란하다. 지금 한국 민주주의를 위기로 몰아넣은 이가 누구인가. 스웨덴 예테보리대학에 본부를 둔 민주주의다양성연구소는 지난달 ‘민주주의 리포트 2024’에서 한국을 ‘독재화(Autocratization)’가 진행 중인 42개국에 포함시켰다. 시민들의 목소리를 경청하고 이를 반영해 해법을 찾는 게 민주주의다. 오기와 독선으로 정책을 밀어붙여 시민을 불안하게 하는 건 민주주의라 부를 수 없다.
④ 군왕무치(君王無恥·왕은 부끄러움이 없음)
담화문 후반에서 윤 대통령은 “회피하고 싶은 인기 없는 정책도, 국민에게 꼭 필요하다면, 국익에 꼭 필요하다면 과감하게 실천하며 여기까지 왔다”고 자평했다. 한·일 관계, 화물연대·건설노조 대응, 원전 정책 등을 과감한 실천이 낳은 치적으로 내세웠다. 이들 정책이 많은 비판을 받고 후폭풍이 여전함에도, 자신은 틀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윤 대통령은 건전재정 기조를 거론하며 “정부 출범 당시 6~7%에 이른 물가는 건전재정 기조가 아니었다면 지금도 2~3%대로 잡히지 않았을 것”이라고 자찬하기도 했다. 뜬금 없는 물가 언급은 “대파가 한 단에 875원이면 합리적”이라는 발언을 의식한 것으로 비쳤다. ‘대파’ 파동으로 고물가가 총선 핵심 이슈로 부각되자 억울했던 모양이다.
윤 대통령은 지난해 10월 서울 강서구청장 보궐선거에서 국민의힘이 패배한 이후 “국민은 늘 무조건 옳다. 어떠한 비판에도 변명해서는 안 된다”며 고개를 숙였다. 말뿐이었다. 윤 대통령은 달라지지 않았고, 앞으로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설령 총선에서 국민의힘이 진다 해도 그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