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일으켜 주세요”

신동호 논설위원

철탑 밑에서 갑자기 그 노래가 뇌리에 맴돌면서 이어진 일들은 참으로 기묘한 경험이었다. 지난 5일 울산 현대자동차 명촌주차장 철탑 아래를 서성거리다가 얼마 전 작가인 친구가 들려준 이야기가 왜 떠올랐는지 이해하는 것조차 꽤 시간이 필요했다. 그것은 ‘나를 일으켜 주세요’, 시크릿가든의 ‘유 레이즈 미 업(You Raise Me Up)’을 배경 음악으로 한 그의 작품 구상이었다.

1980년대 대학로 연극판을 떠돌던 남녀가 있었다. 그들의 꿈은 연극이었다. 아니 삶의 전부였다. 오를 수 있는 무대, 연기할 수 있는 대본, 극장을 찾는 관객이 있으면 그만이었다. 물질적 보상은 고사하고 빈궁한 일상마저 유지하기 버거웠지만 무대에서의 행복은 그보다 남음이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그런 꿈을 함께 일궈나가기 위해 곡절 많은 연애 끝에 결혼했다.

[경향의 눈]“나를 일으켜 주세요”

작가 친구가 들려준 얘기는 그로부터 20여년 세월이 흐른 지금 그들의 새로운 꿈이었다. 놀랍게도 그것은 연극이 아니었다. 골프 선수가 되려 하는 딸의 프로 데뷔, 정확하게는 그것을 살아서 보는 것이었다. 딸이 프로에 데뷔하려면 나이 조건 때문에 적어도 2년을 기다려야 하고, 엄마는 최근 육종암 말기 판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녀의 시한부 삶은 길어야 2년이라고 했다.

예전에 나는 이들 부부가 서울 근교의 외진 곳에 터를 잡고 야간 대리운전을 하면서 억척스럽게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있다. 딸의 꿈을 이루기 위해 자신들의 꿈은 접은 지 이미 오래라는 얘기와 함께였다. 그 후로 그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들은 바 없다. 꼬마이던 딸이 청소년이 되었고 실력이 일취월장했다는 소문을 바람결에 흘려 들은 것 같기는 하다. 최근 작가 친구가 그들을 모델로 한 연극 구상을 내게 귀띔해줄 때까지 나는 그들을 까맣게 잊고 지냈다.

원래 희곡으로 문단에 데뷔한 내 친구는 연극 연출을 하면서 연극인 부부와 작품을 함께한 적이 있다. 딸의 엄마는 그에게 주연 여배우로 캐스팅돼 열연한 추억을 아직도 그리워할 정도라고 한다. 부부는 절망에 빠져 있었다. 2년 동안 살기 위한 투병에 몰두하자니 딸의 뒷바라지가 어렵고, 딸의 데뷔에 주력하자니 연명을 위한 활동과 비용 지출이 불가능한 형편이기 때문이다. 이들의 딱한 처지를 들은 친구 역시 사정이 딱하기는 마찬가지인지라 함께 절망했다.

상념에서 깨어난 건 서울에서 내려온 ‘희망버스’가 도착했을 즈음이었던 것 같다. 비로소 스피커의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철탑 밑의 사물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철탑 농성 81일차’라는 표시, ‘해고 없는 세상’ 대장군과 ‘비정규직 없는 세상’ 여장군 장승, 한전이 신청한 ‘퇴거단행 및 출입금지 가처분’에 대한 2013년 1월3일자 울산지법 집행관 명의의 고시, 주변의 농성천막 등이 눈에 들어왔다. 세 번째 철탑 밑을 서성거리면서도 지나쳤던 것들이다.

나도 모르게 서울에서 KTX를 타고 희망버스를 앞질러 철탑 아래로 온 까닭을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작가 친구가 말해준 반전이 무작정 이곳을 찾게 했는지 모른다. 그는 연극인 부부를 일으켜 세울 방도가 없다는 데서 방법을 찾았다. 그것은 포기했던, 아니 접어두었던 그들의 꿈을 붙잡아 일으키는 것이다. 20여년 세월의 창고에 쌓아두었던 꿈의 먼지를 털고 빛바랜 재능의 녹을 닦는 것이다. 그녀를 위한, 그녀에 의한, 그녀의 연극을 무대에 올리는 것이다. 그것이 그녀를 세울 수는 없을지 몰라도 일으킬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자면 시간이 없다!

철탑 위에서 최병승씨의 목소리가 들렸다. “…힘듭니다. 춥습니다. 너무너무 보고 싶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내려가고 싶습니다. 그러나 두렵습니다. 신규 채용을 받고, 동지들을 배신하고 세상을 살아갈 자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 전 이런 꿈을 꿉니다. 이 땅에 비정규직 없는 세상이 오는 꿈 말입니다….” 그 순간 작가 친구가 말해줘 스마트폰에 담아 수십번을 들었던 ‘유 레이즈 미 업’의 선율이 그의 외침과 어울려 뇌리에서 장엄한 하모니를 이루었다.

종교적 영성 체험과 비슷할 것 같은 이런 내면의 울림이 왜 일어났는지 아는 데는 그리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희망버스에 동승해 ‘촛불문화제’가 열리는 부산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에 이르렀을 때였다. 국립오페라합창단 비정규직지회 조합원들이 나와서 처음 부른 노래가 ‘유 레이즈 미 업’이었다. 작가 친구에게 전화를 하려고 스마트폰을 꺼내면서 문득 무대 왼편에 눈이 갔다. ‘고 최강서 열사 분향소’가 보였다. 전화를 걸려다가 분향소 위 건물 3층 벽에 적힌 구호를 보고 소스라쳤다. ‘Beautiful World 조선강국! 선진기술!’이라는 글자와 함께 내걸린 큰 영문 표어, ‘Build Your Dream!’이 어둠 속이지만 선연했다.

딸의 데뷔를 보는 것, 다시 일터로 돌아가는 것, 비정규직 굴레를 벗는 것, 이런 소박한 꿈들을 조롱하는 듯한 표어 밑에 절망한 노동자의 빈소가 있었다. 죽음을 앞둔 배우를 일으킬 연극처럼 기진맥진한 노동자의 몸을 일으킬 희망의 불씨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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