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승적 결단’인가 ‘일방적 패배’인가 ···정부의 강제징용 해결책 발표에도 ‘완전 해결’은 불투명

유신모 기자
정부가 일본과의 최대 외교 현안인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문제를 매듭짓기 위한 해법을 공식 발표한 6일 오후 서울 용산구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피해자 대리인단, 지원단체 측이 입장 발표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정부가 일본과의 최대 외교 현안인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문제를 매듭짓기 위한 해법을 공식 발표한 6일 오후 서울 용산구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피해자 대리인단, 지원단체 측이 입장 발표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정부가 6일 일제 강제동원(징용) 피해자 배상판결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공식적으로 발표함에 따라 한·일관계의 최대 갈등 요인이 적어도 양국 간에는 일단락될 가능성이 커졌다. 박진 외교부 장관이 이날 공개한 정부 해결책은 행정안전부 산하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 2018년 3건의 대법원 확정판결 원고들에게 판결금 및 지연이자를 지급하고, 현재 계류 중인 관련 소송이 원고 승소로 확정될 경우에도 역시 판결금 등을 지급한다는 내용이다. 이 해법은 일본에 행동적 조치를 요구하지 않고 한국 정부가 국내적으로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이기 때문에 일본 정부가 반대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일본 피고기업들이 문제 해결에 참여하지 않고 일본 정부의 사과 또한 과거의 것을 되풀이하는 수준이어서 국내적 반발을 불러올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정부의 발표로 강제징용 배상 문제가 완전히 끝날 수 있을지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일본의 ‘호응 조치’

정부의 국내적 해결 방침에 일본이 호응해서 내놓는 조치는 ‘일본 정부의 포괄적 사과와 피고기업을 제외한 기업들의 자발적 기여’로 요약된다. 정부는 당초 일본에 피고기업의 기부금 조성 참여와 강제징용에 대한 명시적 사죄 표명을 요구했으나 일본이 이를 거부해 관철시키지 못했다.

이날 하야시 요시마사 일본 외무상은 한국의 발표와 관련, 역대 내각의 역사 인식을 전체적으로 계승한다고 언급했다. 이는 식민지배로 고통을 준 과거사 문제에 대한 사과를 되풀이한다는 의미여서 강제징용 문제에 대한 명시적 사과는 아니다. 또한 하야시 외무상은 일본 기업의 기부금 출연에 대해서도 “민간 기업에 의한 국내외의 자발적인 기부 활동 등에 대해서는 특별한 입장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해 정부의 조치가 아니라 기업들의 자발적 행동에 달려있음을 강조했다.

한·일은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와 게이단렌(일본경제단체연합회)이 ‘미래청년기금’(가칭) 공동으로 조성해 운영하는 방안을 추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이 역시 피고기업은 참여하지 않는 데다 강제징용 문제와는 무관한 성격이다. 특히 일본 측이 돈을 내는 시점이 언제인지도 확실치 않다. 한 외교소식통은 “수년이 지나고 한국 내에서 강제징용 문제가 잘 마무리되고 더 이상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이 섰을 때 돈을 낼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정부 결정 배경

북한의 핵위협, 미·중 전략경쟁 심화, 반도체·에너지 공급 문제 등 경제적 상황을 감안하면 한·미·일 협력 강화의 전제조건인 한·일 관계 회복이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다. 한·일관계를 이대로 두는 것은 한국에게 전략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에 강제징용 판결 문제가 시급히 해결되어야 한다는 점에는 누구나 공감할 수 있다.

정부는 이번 결정을 ‘미래지향적 한·일관계 구축을 위한 대승적 결단’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또한 피해자가 고령이어서 시급히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점, 엄중한 국제 정세 속에서 장기간 경색된 한·일관계를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는 점도 강조했다. 모든 상황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정부가 정치적 부담을 감수하고 결단을 내렸다는 설명이다.

그럼에도 하필 지금이냐는 의문은 남는다. 정부는 “문제 해결에 시한을 두지 않고 있다”고 누누이 강조해왔지만 사실 이날 발표 배경에는 5월 일본 히로시마에서 열리는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 주최국인 일본의 초청을 받아 참석해야 하는 문제가 있다. 정부는 윤 대통령의 이달 일본 방문, 다음달 미국 방문에 이어 G7 정상회의에서 한·미·일 정상이 손을 잡고 3국 협력 강화를 천명하는 자리를 만드는 일정을 상정하고 있다. 한·미, 한·일관계에 정통한 소식통은 “G7 정상회의 참석을 기준으로 두고 시간을 역산해 외교 일정을 짠 결과 설익은 상태로라도 강제징용 문제를 지금 풀어야한다는 계산이 나왔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 결정의 문제점

정부가 제시한 ‘제3자 변제’는 외교적 마찰과 혼란을 최소화할 수 있는 현실적으로 거의 유일한 해법이다. 민관협의회 등에 참석한 피해자 측도 일정한 조건을 전제로 제3자 변제에 동의한 바 있다. 하지만 피해자와 국민 여론의 동의를 충분히 받지 못한 상태에서 제3자 변제 해결책을 발표한 것이 가장 큰 문제점이다.

정부는 공론화와 사회적 동의를 거쳐 자연스럽게 제3자 변제라는 결론에 이르도록 하는 데 실패했다. 정부는 일방적으로 해결책을 추진하면서 피해자·여론·야당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이들이 반대할 명분을 스스로 제공했다. 정부는 민관협의회의·공개토론회 개최, 피해자 면담 등의 절차를 거쳤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이들 절차는 미리 결론을 정해놓고 치른 요식행위와 마찬가지였다.

정부는 ‘국격에 걸맞은 대승적 결단’을 내려 우리가 먼저 주도적으로 일을 해결하고 일본이 호응하도록 유도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협의 과정을 살펴보면 입장이 오락가락했음을 알 수 있다. 정부는 국내적 해결 방침을 세웠다가 여론의 반발이 거세지자 다시 일본에 피고기업의 기금 참여와 사죄표명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요구했다. 정부 당국자는 지난 1월 공개토론회 “일본 측의 호응이 전제되어야 정부 해법을 발표할 수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하지만 일본이 태도 변화를 보이지 않자 결국 스스로 물러섰다.

이 같은 과정을 거치면서 결국 일본의 요구를 수용했기 때문에 정부 해법에는 강제징용 피해자에게 일본 기업이 배상해야 한다는 대법원의 판결 취지가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과거사를 뭉뚱그린 포괄적 사과, 피고기업이 빠진 자발적 기금조성 등은 강제징용 배상 판결과 아무 관련이 없는 조치들이다. 수출규제 해제를 협의하겠다고 했지만 이 역시 일본이 스스로 강제징용 판결과는 무관하다고 밝힌 사안이다.

■향후 전망

이번 정부의 결정으로 한·일은 외교적 갈등을 봉합할 수 있는 계기를 잡을 것으로 보인다. 또 한·미·일 협력 확대에 가장 큰 걸림돌이 제거됐다는 점에서 3국 협력의 범위는 안보·경제 등 모든 분야에서 확장될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 백악관·국무부가 즉각적으로 한국의 결정을 환영하는 입장을 내놓은 것에서도 미국의 기대가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다.

하지만 국내적 혼란은 불가피해 보인다. 정부의 발표에 피해자측 단체와·진보세력·야당 등이 일제히 강력한 반대를 표시하고 정부를 규탄하는 입장은 내놨다. 정부의 결정에 반대하는 피해자들은 이날 압류된 일본 피고기업의 국내자산을 매각하는 강제집행 절차를 다시 시작하겠다고 밝혔다. 이 문제는 한·일 간의 갈등 요소에서 국내적 갈등 요소로 변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정부의 해법이 법적으로 불완전하다는 점도 이 문제의 완전한 해결을 어렵게 만들 것으로 보인다. 배상 확정판결을 받은 피해자가 정부의 배상금 대리 변제를 거부할 경우 이들이 갖고 있는 법적 권리를 합법적으로 제한할 수 있을지는 여전히 법조계의 논란거리로 남아있다. 정부가 이 같은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하면 강제징용 판결 해법은 위안부 합의와 같은 전철을 밟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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