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자 카타리나와 장미

이선 | 한국전통문화대 교수

어느새 2021년의 끝자락이다. 12월은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새해를 준비하느라 늘 분주하고 들뜨기 마련이다. 게다가 성탄절이 있어 성스럽기까지 하다. 그런데 올해는 여러 상황으로 어수선하고 음울하다. 바이러스가 던진 화두를 붙잡고 전 세계인들이 벌써 2년째, ‘이 뭣고!’ 씨름 중이다.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주변의 사람과 자연을 둘러보라는 메시지로 해석할 만하다.

온 세상이 펜데믹에 뒤덮여 우울한 연말, 성화(聖畵) 전시회가 열렸다. 서울역 인근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의 <러시아 이콘: 어둠을 밝히는 빛> 특별전이 그것인데, ‘어둠을 밝히는 빛’이라는 제목이 반갑다. 이콘(icon)은 동방정교회에서 주로 제작된 성화의 형식을 의미하며, 고대 그리스어로 형상과 모상을 뜻하는 에이콘(eikon)에서 유래했다.

전시된 성화 중에 ‘순교자 카타리나’는 14성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4세기경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귀족 집안 출신이다. 지성과 미모를 갖춘 그녀는 과학과 언어 그리고 문학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고 한다. 그녀는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는 로마 황제 막센티우스와 대립하며 많은 사람을 개종시킨 죄로 참수되어 순교하였다. 그녀의 이야기가 박물관 지하에 전시된 신유박해의 기록과 묘하게 오버랩된다.

‘순교자 카타리나’ 이콘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왕관을 쓴 카타리나의 오른손에 장미 한 다발이 들려 있다. 일반적으로 카타리나를 그린 성화에는 순교와 관련된 수레바퀴와 순교자를 상징하는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있는 모습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장미를 든 것이 이채롭다. 유럽에서 장미는 꽃 중의 꽃으로 다양한 상징성을 띤다. 붉은 장미는 승리를 상징하는 비너스를, 흰 장미는 순결과 영적 사랑을 의미하여 숱한 성모상 그림에 등장한다. 또한 ‘신비한 장미(Rosa mystica)’는 성모 마리아 자체를 뜻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교회에서는 고대 모권 사회에서 극락의 방향이던 서쪽에 장미창(薔微窓)을 내고 그 아래에 마리아를, 반대편의 동쪽에는 앱스(apse)에 십자가를 모셨다. 성 도미니크의 장미 묵주(rosario)도 같은 의미이다. 러시아에서는 순교한 카타리나를 혹시 성스러운 마리아의 화신으로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돌아오는 길, 서울역 앞의 노숙인 텐트 옆을 지나며 박물관 야외에서 보았던 티모시 슈말츠의 ‘노숙자 예수상’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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