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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서사 아카이브

플랫팀이 여성들의 이야기가 담긴 책을 추천하는 ‘플랫pick’. 비정기적으로 여성 작가의 신간과 여성 서사가 담긴 새로 나온 책을 소개합니다. 첫 번째 pick은 구정인 작가의 <비밀을 말할 시간>, 최현숙 작가의 <억척의 기원>, 김인선 작가의 <내게 가장 소중한 것은 나 자신이었다>입니다. #플랫pick



[플랫pick]#비밀을 말할 시간#억척의 기원#내게 가장 소중한 것은 내 자신이었다[플랫]

어린 시절 성추행을 당한 피해자가 진정으로 ‘괜찮아지려면’ 얼마 정도의 시간이 필요할까? 3년? 5년?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니 아무리 끔찍한 기억이라도 10년쯤 지났다면 희미해지지 않을까? 틀렸다. 상처는 시간이 흐른다고 저절로 치유되지 않는다. 기억과 마주하고, 피해를 정의하고, ‘네 잘못이 아니다’라는 주변의 공인을 받은 후에야 비로소 피해자는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

<비밀을 말할 시간>은 중학생 은서가 일곱살 때 겪은 아동 성폭력 트라우마를 극복해나가는 과정을 그린다. 놀이터에서 낯선 사람에게 성추행을 당한 기억은 9년이 지났지만 오히려 선명해진다. 왜 나는 도망가지 않았을까? 도움을 청하지 않았을까? 엄마는 왜 나를 내버려두었을까? 대상을 찾을 수 없는 분노는 자신과 엄마를 향한다. 사과를 받을 수도, 책임을 물을 수도 그렇다고 잊을 수도 없는 사건 앞에서 은서는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플랫pick]#비밀을 말할 시간#억척의 기원#내게 가장 소중한 것은 내 자신이었다[플랫]

비밀을 말할 시간
구정인 글·그림
창비 | 204쪽 | 1만3000원

길고 어두운 터널에서 빠져나와 도움의 손길을 내밀게 되기까지 은서를 붙잡았던 건, 다름 아닌 은서 자신이다. “나는 잘못한 게 없어. 벗어나고 싶어. 위로받고 싶어.” 콘서트에 가려고 모아둔 돈을 빌려줄 테니 함께 병원에 가보자는 친구 지윤, 몸보다 마음의 후유증을 치료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산부인과 의사. 은서는 다른 여성의 도움을 받아 ‘내 몫이 아닌 것들’과 서서히 이별해간다.

전작 <기분이 없는 기분>에서 아버지의 고독사를 다룬 구정인 작가의 신작이다. 아동 성폭력의 심각성을 알리고 자신을 긍정하며 삶을 되찾아가는 여성 청소년 서사가 귀하게 느껴진다. “이 나라에서 여자로 살면서 성추행 안 당해본 게 더 신기하다”는 지윤의 말처럼, 은서의 비밀은 은서 혼자만의 비밀이 아니었기에.

[플랫pick]#비밀을 말할 시간#억척의 기원#내게 가장 소중한 것은 내 자신이었다[플랫]

억척의 기원
최현숙 지음
글항아리|352쪽|1만8000원

10여년간 ‘나이 든 여성’의 이야기에 천착해 온 ‘구술 생애사 작가’ 최현숙의 신작이다. 세상과 싸우느라 ‘억척스러워진’ 나주의 두 여성 농민이 주인공이다. <할매의 탄생> 속 우록리 할머니들보다 한 세대 어리고, 더 주체적이다.

김순애(62)는 어린 시절엔 아버지, 결혼 후엔 남편과 시어머니의 폭력에 시달렸다. “이혼해줄래, 장사를 하게 해줄래.” 남편의 외도를 계기로 장사를 시작했고 경제적 자립에 성공한다. 정금순(61)은 전남편과의 첫 외출에서 성폭행을 당했고 떠밀리듯 결혼한다. 16년 만에 이혼한 후엔 세신사로 일하며 홀로 자식들을 키웠다. 자식들이 다 자라고 몸이 완전히 망가진 후 재혼을 했다. 나주의 농촌으로 돌아간 그는 지금 ‘5만평’을 소유한 대농이 됐다.

몇 줄로 요약하기 어려울 만큼 굴곡진 삶. 사람들은 이들에게 “독하다”고 말했지만, 최현숙은 “독한 것과 여린 것은 동전의 양면”이라고 말한다. 이들은 시대의 한계를 이겨내고 때로 이용하면서, 주체적인 여성이자 농민 활동가로 거듭난다. “주인공의 힘과 열정, 상처와 분노가 나를 붙들기도 하고 안타깝게도 했다.” 운동가이자 돌봄노동자이기도 한 ‘중년 여성’ 최현숙은 이들에게 때로는 공감하고, 때로는 거리를 두면서 그 삶과 의미를 섬세하게 기록해낸다.

전라도 사투리의 말맛을 살린 구술은 읽기에 다소 어렵지만 충분히 매력적이다. 책의 백미는 동년배인 화자와 청자가 친구처럼 주고받는 대화에 있다. 인터뷰의 흐름을 최대한 살리려다보니, 구술은 주제와 시간을 자주 넘나든다. 하지만 우리 인생도 “좌충우돌과 진퇴양난을 거듭하며 시간을 타고 엉키며” 나아간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삶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라 할 만하다.

[플랫pick]#비밀을 말할 시간#억척의 기원#내게 가장 소중한 것은 내 자신이었다[플랫]

내게 가장 소중한 것은 나 자신이었다
김인선 지음
나무연필 | 212쪽 | 1만4000원

“내 인생 가운데는 내 의지와 무관하게 운명처럼 주어진 부분이 있다. 가령 부모님이 원치 않았건만 내가 태어나게 된 것을 나는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이후 나는 낯선 독일에 와서 간호사로 일했고, 신학을 공부했고, 독일로 이주해서 살아가다가 죽음을 앞둔 이들을 돌보는 호스피스 단체를 만들었다. 또한 한 남자를 만나서 결혼했다가 이혼했고, 지금은 나를 사랑해주는 한 여성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저자는 자신의 인생을 저렇게 간단하게 설명한다. 그러나 직접 살아내는 일은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그의 존재를 부정하는 어머니와 평생 불화했다. 남편이 있었지만 어느날 갑자기 여자를 사랑하게 됐고, 그 여자를 선택했다. 어느 하나 견디기 쉬운 일이 없었다. 그래도 그는 지금까지 살아냈다. 끝없이 자신을 사랑하면서.

70년을 살아온 여성의 개인적 소회로만 여길 책은 아니다. 그의 인생 뒤로는 한국과 독일의 현대사가 함께 흐른다. 한국전쟁이 나던 해 ‘여자로’ 태어난 저자의 삶에는 그때 그 시절 사람들의 척박한 삶이 새겨져 있다.

독일에 정착해 간호사로 살아가고 광부 출신 남편을 만난 이야기에는 인력난이 심하던 독일, 그리고 외화 부족과 실업난에 시달리던 한국이 서로의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만들어낸 광부와 간호 인력 파견의 역사가 녹아 있다. 저자는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 남북 분단의 현실을 떠올린다. 독일에서 일했고 지금도 살고 있는 저자의 시각은 우리 사회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성소수자를 탄압하던 나치 시대의 역사를 뒤로한 채 성소수자 인권에 대해 진보적 정책을 펴는 나라가 된 독일의 실례도 눈에 들어온다.


심윤지 기자 sharpsim@khan.kr
홍진수 기자 soo43@kh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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