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후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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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랫팀

여성 서사 아카이브

퇴근 후는 온전히 나를 위한 회복의 시간입니다. 일상에 지쳐 쉬는 방법을 잊은 당신에게, 경향신문 여성 기자들이 퇴근 후 시간과 주말의 일상을 공유하는 [퇴근후, 만나요]를 연재합니다. 누군가의 사소한 일상이 영감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퇴근 후, 만나요] 아침의 수영장에서 만나는 여자들의 얼굴



아침의 수영장에서 여자들의 얼굴을 보는 게 좋다. 앳된 얼굴도 있고 주름이 자글자글한 얼굴도 있다. 그것을 하나하나 홀린듯 바라보게 될 때가 있다. 물 밖에서 각자의 일상과 고투하다가 이곳에 와 진지한 얼굴로 물을 헤쳐 가는 법에 대한 선생님의 설명을 듣고 있는 모습을.

남자들을 제치고 앞서 헤엄쳐 나가는 것도 좋다. 쾌활하고 세심한 우리반 담당 여자 선생님은 2개월 차에 나를 중급반 맨 앞자리로 당겨 세워 주었다. 간격을 한참 두고 출발해도 머리가 자꾸 앞사람 발에 가닿는 걸 눈여겨 본 모양이었다.

아침의 수영장에서 만나는 여자들의 얼굴[플랫]

사람의 능력치란 수없이 많은 요인이 합쳐 만든 결과물이고, 시공간에 따라 달라지기도 한다는 것, 그러니 성별로 갈라 누구의 능력을 어림잡는 것만큼 어리석은 게 없다는 것을 머리로 알지만, 가끔은 이렇게 눈으로 확인해 둬야 마음이 편하다.

성별에 대한 편견을 체화했든 날카롭게 비판하든, 여자들은 모두 ‘여자니까 어떨 것이다’라는 기대와 싸우며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러니 살 수록 자매애가 깊어지는 것을 어쩔 수 없다. 언제부턴가 일상에서 만나는 거의 모든 여자들을 마음 속에서 ‘언니’로 부르고 있다.

수영장의 우리반에도 큰 언니가 한 분 계신다. 몸을 쓰는 모양새로 미루어 연세가 아주 많을 것 같은 그녀는 활기가 넘치고 고집이 세며 귀가 잘 들리지 않는다. 선생님의 지시를 무시할 때가 많아 살짝 무법자의 느낌도 있다. 언제나 오리발을 끼고 헤엄치는데 속도가 안 난다 싶을 땐 팔로 로프를 쭉쭉 잡아당겨 몸을 앞으로 밀어낸다. 본인의 자세는 엉망인데 다른 수강생의 자세에 곧잘 훈수를 두기도 한다. 그런데도 밉지 않다. 못하는 것을 부끄러이 여기지 않는 저 당당한 태도를 닮고 싶을 뿐이다.

샤워실에서 언니들은 거칠다. 남의 일에 참견하는 데도 거침이 없다. 몸은 제각각이다. 한 눈에 우아함을 눈치챌 수 있는 몸은 아주 가끔씩만 있다. 그런 몸은 꼭 아등바등 살지 않아도 되었음을 증명하는 징표 같다. 대개는 이렇게 저렇게 애쓰며 살아온 흔적이 온 몸에 드러나있다.

나의 몸도 마찬가지다. 뭐든 ‘남자처럼’ 잘 한단 소리를 듣고 싶어 평생 힘을 주고 살아온 몸에 서두른 흔적이 불필요한 근육들로 남아있다. 자세에는 빨리 가려는 내가 덕지덕지 묻어있다. 바빠서 온 몸에 힘을 주고 살아온 엄마의 몸도 나와 비슷하다. 노년에 접어든 엄마에게서 이제야 힘이 조금씩 빠지는 것을 본다.

왼쪽 책방에서 받아와서 창 옆에 붙여둔 그림(왼쪽)과 수영하고 기분 좋을때 쓴 메모(오른쪽). 물에뜬도토리 제공

왼쪽 책방에서 받아와서 창 옆에 붙여둔 그림(왼쪽)과 수영하고 기분 좋을때 쓴 메모(오른쪽). 물에뜬도토리 제공

이제는 남자보다 못하지 않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애쓰지는 않겠다고 생각한다. 성별이 어찌되든(자신이 여성도 남성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힘이 많든 적든, 곡선이 울퉁불퉁하든 매끈하든, 몸은 원래가 제각각이고 그 자체로 온전하다.

필요한 데만 힘쓰는 법을 배우려고 요가를 하고 헤엄을 친다. 하지만 때로 힘을 빼지 못하는 나의 몸도 미워하지 않으려고 한다. 수영장 사워실에서 만나는, 각자의 인생이 묻어난 여자들의 몸이 그대로 좋아보여 힘이 된다.

나는 여자들을 보는 게 좋아서 오늘도 수영장에 간다.

추천하는 콘텐츠 : ‘어쩌다 여탕 터줏대감’ 오혜자와 ‘여탕서 키운 무용하는 딸’ 유라 이야기. 김유담 소설 <이완의 자세>

물에 뜬 도토리
뉴콘텐츠팀 기자. 몸을 써서 작은 배움을 쌓아 나가는 걸 좋아하는 ENF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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