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후 만나요
퇴근후 만나요

플랫팀

여성 서사 아카이브

퇴근 후는 온전히 나를 위한 회복의 시간입니다. 일상에 지쳐 쉬는 방법을 잊은 당신에게, 경향신문 여성 기자들이 퇴근 후 시간과 주말의 일상을 공유하는 [퇴근후, 만나요]를 연재합니다. 누군가의 사소한 일상이 영감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퇴근 후, 만나요]'그레이 아나토미'의 인턴은 과장이 됐고, 나는 여전히 미드를 본다



나의 첫 미드는 ‘로스트’였다. 막 고3이 된 어느날, 야자 후 인터넷 강의를 찾아보다(?) 로스트를 발견했다. 추락한 비행기와 무인도, 이 많은 사람들 간 갈등과 협력과 로맨스와 배신과 어쩌구저쩌구가 영화가 아니라 드라마라구? 이 재난미스테리판타지스릴러 장르가 막 섞인 이게 드라마? 나는 즉시 그 압도적인 스케일과 흥미진진한 시나리오에 빠져들었고, 그 후로 야자 후 인터넷 강의 1개에 미드 1편을 보는 매우 피곤한 생활을 이어가다 간신히 대학생이 되었다.

'그레이 아나토미'의 인턴은 과장이 됐고, 나는 여전히 미드를 본다[플랫]

대학생이 된 후에는 대학에서 만난 친구들과 함께 ‘그레이 아나토미’를 보기 시작해 주인공들의 희로애락에 함께 울고 웃으며 졸업을 했고 (믿기지 않지만 이 시리즈는 아직도 끝나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 이제 재미와 관계없이 그냥 주인공들이 아는 사람들 같아서 본다), 직장인이 되었다. 하는 일은 부서를 옮길 때마다 조금씩 달라졌지만 퇴근 후 나의 일상은 변한 적이 없다. 나는 퇴근 후 넷플릭스를 본다. 왓챠를 본다. 웨이브를 본다.

‘그레이 아나토미’ 시즌 1의 메러디스 그레이(엘렌 폼페오, 오른쪽)와 크리스티나 양(산드라 오)가 친구가 되는 장면. 고사리연구자

‘그레이 아나토미’ 시즌 1의 메러디스 그레이(엘렌 폼페오, 오른쪽)와 크리스티나 양(산드라 오)가 친구가 되는 장면. 고사리연구자

이렇게 오랫동안 미드를 본 이유는 미드가 어떤 상황에서도 일정 수준의 만족감을 보장했기 때문이다. 퇴근 후 즐거우면 즐거운대로, 피곤하면 피곤한대로, 화가 나면 또 그런대로 만족스러웠다. 누군가는 퇴근 후 달리기를 하며 쌓인 피로를 털어내고, 요가로 하루의 화를 다스리는 것처럼, 나는 미드를 보며 하루를 정리한다.

산드라 오가 하차한 ‘그레이 아나토미’ 시즌10의 마지막 장면. 좋아하는 캐릭터가 하차하는 건 아쉬웠지만, 지금까지 본 하차 중 가장 멋진 퇴장 (스포일러가 될까 말할 수 없는게 아쉽다) 이었다. 고사리연구자

산드라 오가 하차한 ‘그레이 아나토미’ 시즌10의 마지막 장면. 좋아하는 캐릭터가 하차하는 건 아쉬웠지만, 지금까지 본 하차 중 가장 멋진 퇴장 (스포일러가 될까 말할 수 없는게 아쉽다) 이었다. 고사리연구자

1n년차 미드 시청자로서 요즘은 흥미로운 일이 많다. 현재 시즌 18이 방영 중인 그레이 아나토미는, 시작은 평범한 로맨스물이었으나 어느 순간부터 인종차별과 소수자, 젠더, 총기난사, 불평등 같은 그때 그때의 사회문제를 피하지 않고 다루는 힘있는 시리즈로 성장했다. 시즌 초반 병원의 치프와 각 과 과장들은 거의 백인 남성이었는데, 하나 둘씩 바뀌어 이제는 시즌 초기 인턴이었던 여성 의사들이 그 자리를 맡고있다.

시리즈에서 가장 좋아했던 조연은 이제 자신의 (극 중) 이름을 타이틀로 한 시리즈를 갖게 되었다. 나는 주인공 메러디스 그레이의 친구인 크리스티나 양을 좋아했다. 크리스티나 양은 산드라 오다. 비중있는 조연이어도 어디까지나 ‘백인 주인공의 친한 친구’ 였던 그는, ‘킬링 이브’에서 투 톱 주연을 거쳐 (투 톱이긴 하나 시리즈 제목에 들어간 이름은 산드라 오의 것이다!) 최근엔 원 톱 주연(‘더 체어’)까지 맡았다. 나는 킬링 이브의 대본이 들어왔을 때 스스로도 주인공 역할에 대한 캐스팅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는 그의 인터뷰를 읽으며 같이 마음이 벅찼고, 그 시리즈를 통해 사람들이 산드라 오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할 땐 어찌나 뿌듯하던지, 기회만 생기면 얘기하고 싶었다. 저는 1n년 전부터 좋아했었답니다.

최근에 재미있게 본 ‘조용한 희망’의 한 장면. 고사리연구자

최근에 재미있게 본 ‘조용한 희망’의 한 장면. 고사리연구자

사실 바뀐 것은 그레이 아나토미만이 아니다. 자본은 종종 자기만의 방식으로 시대의 흐름을 정확하게 읽어낸다. 예전엔 어떤 장르든 남성 둘이 ‘버디’로 나오는 시리즈들이 수도없이 많았다. 이젠 같은 장르 비슷한 포맷이라도 여성끼리 파트너인 시리즈들이 크게 늘었다. 시리즈 안 캐릭터들은 모든 면에서 다양해지고 있다. 여러 종류의 차별에 대해, 불평등에 대해 말하는 시리즈들이 늘고있다.

일을 하다보면, 가끔 이 세상이 절대 바뀌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너무 느리게 바뀐다는 생각도 든다. 그럴 때 나의 달리기이자 요가인 OTT에 뜬 다양한 작품들을 넘겨보면 묘하게 위로가 된다. 드라마는 현실을 반영하기도 하지만 우리가 가고싶은, 혹은 언젠가 가게될 현실을 조금 미리 그려내기도 하기에.


정책사회부 기자. 언젠가 ‘아무튼 미드’를 쓸 작정인 고사리연구자

TOP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