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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랫팀이 새로운 시선과 시도로 완성된 콘텐츠를 ‘플랫pick’으로 추천합니다. 여성의 시각으로 세상을 담은 영상과 서적 등을 소개합니다. 이번 ‘pick’은 성적 동의와 폭력, 연대라는 주제를 입체적으로 풀어낸 수작 <아이 메이 디스트로이 유>입니다.



영국의 감독 겸 배우 미카엘라 코엘에게 <추잉검>은 잊을 수 없는 작품이다. 그는 처음 극본과 주연을 맡은 이 작품으로 영국 아카데미상(BAFTA)을 수상하며 대중에게 자신의 이름을 각인시켰다.

단번에 ‘커리어 점프’를 가능하게 한 ‘인생작’이지만, 그는 이 작품을 준비하며 낯선 남자들에게 약물 성폭행을 당했다고 고백했다. 경찰서에 앉아 ‘포켓몬고’를 하는 형사를 기다리며 그는 “앞으로의 인생은 예전과 같을 수 없음을” 직감했다고 했다.

아이 메이 디스트로이유는 성폭력 피해자의 일상 회복이 얼마나 지난한지 보여주면서도, 피해자는 이럴 것이라는 보는 이들의 기대를 번번이 비껴간다. 웨이브 제공

아이 메이 디스트로이유는 성폭력 피해자의 일상 회복이 얼마나 지난한지 보여주면서도, 피해자는 이럴 것이라는 보는 이들의 기대를 번번이 비껴간다. 웨이브 제공

영국 BBC와 미국 HBO가 공동 제작한 <아이 메이 디스트로이 유>(2020)는 코엘이 당시 경험을 토대로 만든 자전적 작품이다. 약물 성폭력 생존자인 작가 아라벨라가 일상을 회복해가는 여정을 그렸다. 코엘이 극본, 공동연출, 주연까지 맡은 이 작품은 “올해 최고의 시리즈”라는 언론의 찬사를 받으며 이듬해 제73회 에미상 극본상을 받았다. 성폭력 트라우마를 전면에 다룬 작품으로는 드문 성취다.

가해자에 대한 복수에 매달리거나, 피해자를 향한 2차가해에 고통받거나.

미디어가 ‘성폭행 이후 달라진 피해자의 삶’을 묘사하는 방식은 대개 이런 식이다. 반면 <아이 메이 디스트로이 유>는 피해자 바깥에서 벌어지는 일보다, 피해자 내면에서 일어나는 변화에 초점을 맞춘다. 성폭력 피해자의 회복이 얼마나 지난한 과정인지 보여주면서도, 피해자는 이럴 것이라는 세간의 편견을 보란 듯이 비껴간다.

우리가 몰랐던 성폭력 피해자의 ‘비하인드 씬’

주인공 아라벨라는 영국 런던에 사는 흑인 여성 작가다. 트위터를 엮어낸 첫 책이 입소문을 타면서 대형 출판사와 계약을 맺고, 지금은 두 번째 책의 초고를 쓰고 있다. 이제 더 미룰 수도 없는 마감 전날, 아라벨라는 “술 마시러 나오라” 친구의 전화를 무시하지 못하고 술집으로 향한다. 그렇게 필름이 완전히 끊겨버린 아라벨라. 다음날 그에게 남은 것은 이마의 상처, 그리고 모르는 남자에게 성폭행을 당하는 기억뿐이다.

아라벨라는 모든 것이 혼란스럽다. 낯선 곳에서 현금을 찾은 기록이 있는데, 어떻게 그곳까지 갔는지는 기억에 없다. 믿었던 친구는 거짓말을 한다. 아라벨라는 그날의 행적을 되짚으며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하려 애쓴다. 그럴수록 ‘약물 성폭행을 당했다’는 심증은 확신으로 바뀐다. 신고를 위해 경찰서로 향하던 그는 참았던 눈물을 터뜨린다.

술과 마약, 유흥을 즐기는 아라벨라는 사회가 기대하는 ‘완벽한 피해자’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거의 모든 등장인물은 아라벨라에게 지지적이다. 웨이브 제공

술과 마약, 유흥을 즐기는 아라벨라는 사회가 기대하는 ‘완벽한 피해자’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거의 모든 등장인물은 아라벨라에게 지지적이다. 웨이브 제공

술과 마약, 유흥을 즐기는 그는 사회가 기대하는 ‘순결한 피해자’의 모습에서 벗어난다. 하지만 거의 모든 등장인물이 아라벨라를 지지한다. 신중하게 수사를 진행하는 여성 경찰, 헌신적으로 그녀의 회복을 돕는 친구들, 글을 쓰지 못하는 그녀를 위해 마감을 연기해주고 조수를 붙여준 출판사… 회복에 필요한 자원은 모두 준비돼있는 듯 보인다.

그럼에도 생존자가 감당해야 할 일상의 무게는 가볍지 않다. 이름도 모르는 범인을 잡을 가능성은 요원해 보이고, 식료품 살 돈도 없는 아라벨라는 어떻게든 글을 써내야 한다. 주변인들은 아라벨라가 하루 빨리 ‘사건 이전’으로 돌아가기를 바라지만, 아라벨라와 그들의 관계는 더는 예전과 같지 않다. 아라벨라 자신조차 자신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작가 콘퍼런스에서 예상치 못하게 ‘미투’를 하고 돌아온 밤. 아라벨라의 신고로 곤경에 처한 마약상 남자친구는 그를 비난한다. ‘네가 술만 마시지 않았어도 강간당하지 않았을 거야!’ 화를 내며 전화를 끊은 아라벨라는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려다 돌연 셀카를 찍는다. 그리고 이를 인스타그램에 올린다. “당신은 영웅이에요.” 쏟아지는 응원 댓글에 ‘좋아요’를 누르는 아라벨라의 무표정한 얼굴 위로 흥겨운 배경 음악이 깔린다. 전형적이지 않아 현실적인, 성폭력 피해자의 ‘비하인드 씬’이다.

성폭력은 단순한 ‘젠더 문제’가 아니다

아라벨라는 친구들과 운동을 하고, 심리 상담을 받으며 그날의 기억을 떨치려 한다. 하지만 혼자 있을 때 밀려드는 감정들은 감당하기 버겁다. 그때마다 아라벨라는 이렇게 중얼거린다. “세상에는 굶주리는 아이들이 있다. 시리아는 내전 중이다. 모두에게 스마트폰이 있는 건 아니다.”

그런 그에게 심리상담사는 이렇게 조언한다. “때때로 큰 그림을 보려고 노력하다 보면 작은 그림에 대한 시야는 완전히 잃어버리게 되죠. 여기서 작은 그림은 당신이에요.” 그렇게 아라벨라는 애써 외면했던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기 시작한다.

코엘은 아라벨라의 대사를 빌려 성폭력이 단순한 젠더 문제가 아님을 분명히 한다. 웨이브 제공

코엘은 아라벨라의 대사를 빌려 성폭력이 단순한 젠더 문제가 아님을 분명히 한다. 웨이브 제공

영국에 사는 노동계급 흑인 여성으로서, 아라벨라는 중층적인 소수자성을 가지고 있다. 그중에서도 인종과 계급이라는 정체성이 그의 삶에 미치는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여성으로서 경험한 차별과 폭력에 대해 말하는 것은 그가 속한 흑인 커뮤니티에서는 일종의 사치였다. 하지만 어느 날 재난처럼 닥친 성폭력이 아라벨라의 세계를 송두리째 흔들어놓는다. 그는 다양한 인종의 여성들이 모인 성폭력 자조 모임에서 낯선 편안함을 느낀다.

“강간당하기 전 나는 자신이 여자임을 주목하지 않았고 내가 흑인이고 가난함에 주목했다. 내 성별이 내 자유와 생존에 미칠 수 있는 위험성을 감히 관찰하려는 건 내가 태어난 임대 아파트를 배신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런던 경찰청과 그곳의 운영을 망치는 만성적인 인종차별을 생각하면 그곳에서 피해진술을 하는 것이 그 자체로 범죄처럼 느껴졌다. (...) 여성이라는 주인을 섬기기엔 너무 늦은 걸까? 고통받는 여성으로서의 삶을 내가 정말 이해하고 있는가?”

코엘 감독은 아라벨라의 독백을 통해 성폭력이 단순한 ‘젠더 문제’가 아님을 분명히 한다. 사람의 정체성은 단일하지 않고, 같은 성폭력이라도 그 양상은 인종과 계급, 섹슈얼리티 등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아라벨라와 그의 게이 친구 콰미가 성폭력을 당했을 때 경찰과 주변인의 반응은 사뭇 다르다. 아라벨라의 친구 테리는 성폭행 피해자 자조모임을 운영하는 백인 고교 동창 시오도라에 대한 적의를 숨기지 않는다.

하지만 이 모든 논의의 복잡함을 정면으로 응시한 후에도, 코엘은 ‘모두를 위한 연대’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같은 성폭력 피해자임에도 속내를 터놓지 못했던 콰미와 아라벨라는 서로의 아픔을 위로하고, 인종이라는 벽에 가로막혀 있던 시오도로와 아라벨라는 각자의 진심을 내보인다. 치열한 고민 끝에 발견한 연대의 가능성이 값지다.

다시 ‘성적 동의’를 말해야 하는 이유

드라마는 아라벨라와 친구들의 일상을 따라가면서 ‘성적 동의’에 대한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데이팅 앱에서 만난 상대와 좋은 감정을 가지고 ‘원나잇’을 했는데, 그가 동성애자임을 숨겼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됐다면? 관계 도중 콘돔이 빠졌다는 사실을 알게 됐는데, 실수인지 고의인지가 애매하게 느껴진다면?

현실은 ‘동의 없는 관계는 폭력’이라는 구호만큼 명확하지 않다.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하는 폭력은 대부분 ‘회색지대’ 언저리에서 일어난다. 아라벨라의 표현대로 “가해자는 선을 넘는 대신 선을 밟고 서 있고” 피해자는 무엇이 문제인지 명료하게 설명하기 어렵다.

‘성적 동의’에 대한 코엘의 입장은 확고하다. 서로의 경계선이 움직이는 것은 사실이지만, 선을 넘는 것은 어떻게든 상대방에게 상처를 남긴다는 것이다. 웨이브 제공

‘성적 동의’에 대한 코엘의 입장은 확고하다. 서로의 경계선이 움직이는 것은 사실이지만, 선을 넘는 것은 어떻게든 상대방에게 상처를 남긴다는 것이다. 웨이브 제공

그럼에도 코엘의 입장은 단호하다. 서로의 경계선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움직이지만, 그 선을 넘는 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상대방에게 상처를 남긴다. 그러니 아무리 모호할지라도 ‘동의 없는 관계’는 곧 폭력임을 이야기해야 한다. 성폭력 피해자 자조모임에서 한 여성은 자신이 예민하다고 불평하는 남자친구 ‘밥’(자조모임에서 남성인 가해자를 통칭하는 이름)에 대해 성토한다. 아라벨라는 이렇게 덧붙인다.

“밥은 모든 게 부당하다고 생각하겠죠. 게다가 자기 입장이 아주 확고할 거예요. 어디까지가 선이고 침범하는 경우는 뭔지에 대해 여자들이 뭐라고 외치는지 직접 알아봤으니까요. (...) 우린 밥을 관찰해야 해요. 그리고 말해야 하죠. 우리도 세세한 걸 볼 줄 안다고요. 당신은 바로 뒤에서 까치발을 들고 선을 밟아 들어가고 있다고. 규칙도 명확함도 법도 구분도 존재를 잃는 그곳에서 우리가 폭력이라고 부르는 게 정확히 뭔지 보여줄 거라고요.”

극의 후반부로 갈수록, 아라벨라의 시선은 ‘타인’을 넘어 ‘자신’을 향한다. 이 드라마의 진가도 바로 이 지점에서 드러난다. 아라벨라는 가해와 피해,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선을 명확히 그으며 자신을 보호하고자 하지만, 그 과정에서 또 다른 폭력의 가해자이자 방관자가 되기도 한다. 이 사실을 고통스럽게 직시한 후에야, 아라벨라는 침대 아래에 던져두고 잊어버리려 했던 과거의 기억들과 직면한다. 진정한 회복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복수는 정말 피해자를 위한 것일까

가해자에 대한 잔혹한 복수는 성폭력 피해자를 주인공으로 한 작품이 자주 채택하는 서사구조다. 코엘은 극본을 쓰기 위해 머물던 숙소 주인으로부터 마거릿 앳우드의 단편 소설 <돌침대>를 선물 받는다. 한 여성이 어린 시절 자신을 성폭행했던 가해자를 다시 만나게 되면서 벌어지는 일을 다뤘는데, 후반부로 갈수록 이야기는 ‘유혈사태’로 치닫는다. 성폭력 피해 당사자이기도 한 코엘은 “이것은 나를(그리고 아라벨라를) 위한 결말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그는한 언론 인터뷰에서 “아라벨라는 이미 흑인이고, 여성이고, 노동계급이다. 여기에 살인자라는 새로운 라벨링까지 감당할 순 없다”며 “나는 그녀를 웰빙, 평화, 임파워먼트의 공간으로 데려가고 싶었다”고 했다. “진정한 종결을 위해 피해자는 과거를 완전히 떠나 보내는 순간을 찾아야만 한다”고도 했다. ‘사이다 복수’가 영화의 결말이 될 순 있어도, 피해자 인생의 마지막이 될 수는 없다는 뜻이다.

아라벨라가 자신이 원하는 결말을 다시 써보는 후반부는, 복수와 용서의 이분법을 넘어 피해자가 주도하는 회복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웨이브 제공

아라벨라가 자신이 원하는 결말을 다시 써보는 후반부는, 복수와 용서의 이분법을 넘어 피해자가 주도하는 회복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웨이브 제공

전반적으로 보기 편한 작품은 아니다. 드라마는 동성 간 성폭력, 스텔싱, 약물 성폭력, 마약, 임신 중단 등 TV쇼에서 쉽게 보기 힘든 이슈들을 에두르지 않고 다룬다. 성폭력 트라우마를 떠올리게 하는 ‘트리거 워닝’의 위험도 있다.

하지만 무력하게 주저 앉은 피해자의 모습은 없다. 유머는 ‘갑자기 찾아온 반가운 손님’처럼 장면 곳곳에 등장한다. 특히 아라벨라가 자신이 원하는 결말을 다시 써보는 마지막화는 복수와 용서의 이분법을 넘은 진정한 회복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 작품이 성폭력 생존자의 심리치료같은 역할을 했으면 한다”는 코엘의 뜻이 충분히 전해진다.

방영 미국 HBO(2020)

개요 12부작 (30분)

등급 18세 이상 관람가

평점 로튼 토마토 평점 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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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윤지 기자 sharpsim@kh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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