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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1월 6일자 플랫 뉴스레터에 게재된 글 일부를 수정·보완했습니다. 뉴스레터 전문에서는 한 주 간 있었던 젠더 뉴스, 이에 대한 플랫 독자들 반응 등 더 많은 이야기를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백래시의 소음에서 반 보 물러나 여성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면, 매주 금요일 7시 플랫 뉴스레터를 구독해주세요.(▶구독링크 바로가기 https://bit.ly/3zP21Hg)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의 두 주연배우 올리비아 핫세(오른쪽)와 레너드 위팅이 영화사 파라마운트 픽처스를 상대로 5억달러(약 6394억원)에 달하는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미성년자 시절 감독에게 속아 노출 촬영을 했다는 것인데요. 이 영화 개봉이 1968년이었으니, 무려 55년 만의 고발입니다.

소장에 따르면, 프랑코 제피렐리 감독은 배우들에게 나체 촬영을 강요한 뒤 이를 영화 후반부 베드신에 몰래 넣었습니다. 핫세와 위팅은 이것이 아동 성착취, 사기, 성희롱에 해당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제피렐리 감독은 2019년 사망했지만, 파라마운트 픽처스는 청소년을 성적으로 착취한 영상을 배급함으로써 천문학적인 수익을 냈다고도 지적했죠.

1968년 <로미오와 줄리엣>을 연출한 프랑코 제피렐리 감독(왼쪽)과 올리비아 핫세(가운데), 레너드 위팅(오른쪽)이 그해 9월25일 프랑스 파리 파리지엥 극장에서 열린 시사회에 참석했다. AP연합뉴스 사진 크게보기

로미오와 줄리엣

1968년 <로미오와 줄리엣>을 연출한 프랑코 제피렐리 감독(왼쪽)과 올리비아 핫세(가운데), 레너드 위팅(오른쪽)이 그해 9월25일 프랑스 파리 파리지엥 극장에서 열린 시사회에 참석했다. AP연합뉴스

제피렐리 감독은 당초 베드신 촬영을 앞두고 피부 색깔과 유사한 속옷을 입고 촬영할 것이라고 두 주연배우에게 설명했다고 해요. 하지만 촬영 당일, 현장에서 이야기가 달라졌습니다. 감독은 “반드시 나체로 촬영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영화가 실패하고 배우들 커리어도 망가질것”이라고 이들을 압박했습니다. 맨몸이 드러나지 않게 카메라 위치를 조정하겠다는 단서를 달았지만, 이 역시 지켜지지 않았죠.

당시 핫세의 나이는 고작 15살. 위팅은 16살이었습니다. 무명에 가까웠던 어린 배우들은 이 영화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지만, 성폭력 피해 경험이 박제된 영상은 배우 생활 내내 꼬리표처럼 따라붙었습니다. 70대가 된 지금까지 트라우마로 남았을 정도이니, 배우들의 정신적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는 감히 짐작할 수 없습니다.

줄리엣의 미투는 왜 이제 가능했을까

로미오와 줄리엣의 ‘미투’는 왜 55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가능했을까요.

일차적인 이유는, 캘리포니아주 의회가 2020년부터 3년간 아동 성범죄 공소시효(10년)를 한시적으로 없애는 법안을 통과시켰기 때문입니다. 청소년 성폭력은 피해를 인지하고 고발하기까지 길게는 수십년이 걸리는데, 공소시효 제도가 이런 범죄 특성을 무시한다는 문제제기가 많았거든요. 법안 효력이 마감되는 지난해 12월31일 캘리포니아주 법원에는 어린 시절 성범죄를 당한 성인들의 소장이 쏟아졌다고 AFP통신 등은 보도했습니다.

[플랫] “피해자의 용기엔 시간이 필요하다” 미국 ‘공소시효 폐지’ 움직임

[플랫] 할리우드 떠돌던 루머를 ‘미투의 도화선’으로 만든 기자들

할리우드의 성인지 감수성 역시 수십년에 걸쳐 꾸준히 개선됐습니다. 그 결과, 사전 합의되지 않은 노출씬 촬영을 ‘성폭력’으로 보는 인식도 자리를 잡아갔죠. 2017년 영화계에서 시작해 전 세계로 확산된미투 운동(#Metoo)은 이러한 인식 변화의 중요한 분기점이 됐습니다. 하비 와인스타인을 비롯한 영화계 유력 관계자들이 줄줄이 몰락한 뒤, 성차별적이고 착취적인 촬영 관행을 개선하자는 움직임이 활발히 일었습니다.

2017년 하비 와인스타인 성착취를 보도한 뉴욕타임스 기자들의 취재기를 다룬 영화 <그녀가 말했다>의 한 장면. 유니버설 픽쳐스 제공 사진 크게보기

할리우드에 찾아온 변화

2017년 하비 와인스타인 성착취를 보도한 뉴욕타임스 기자들의 취재기를 다룬 영화 <그녀가 말했다>의 한 장면. 유니버설 픽쳐스 제공

그 대표적인 사례가 인티머시 코디네이터(intimacy coordinator)의 등장입니다. 스턴트 코디네이터가 위험한 액션 장면을 인명 피해 없이 찍을 수 있도록 조율하듯이, 인티머시 코디네이터는 신체 접촉이나 노출 장면을 촬영할 때 배우들이 안전하게 촬영할 수 있도록 조율하는 역할을 맡습니다. 촬영 현장에는 몇 명의 스태프가 들어갈지, 카메라 워크나 터치는 어떤 순서로 할지 등을 감독·배우·작가 등과 논의하며 배우들의 불쾌함이나 성희롱 등 범죄를 방지하는 것이죠.

이번 레터에 핫세와 위팅의 소송을 다뤄야겠다고 생각하고, 인티머시 코디네이터를 다룬 기사들을 살펴봤는데요. 감독이 현장에서 성적 장면을 추가·수정하는 것이 ‘예술’이나 ‘디렉팅’의 이름으로 묵인됐던 과거와 달리, 최근 미국 영화계에서는 인티머시 코디네이터 기용이 하나의 관행으로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인티머시 코디네이터의 등장

이타 오브라이언은 인티머시 코디네이터라는 직업을 개척한 선구자로 알려져있습니다. 2020년 에스콰이어 인터뷰를 보면, 이러한 직업이 왜 필요한지, 이들이 얼마나 섬세하고 복잡한 커뮤니케이션을 수행하는지를 알 수 있어요.

오브라이언은 발레리나와 뮤지컬 댄서를 거쳐 배우들의 움직임 전문 디렉터로 활동해 왔는데요. 그가 ‘인티머시 코디네이터’라는 이름으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것은 2017년 하비 와인스타인의 성착취 보도 이후입니다. 특히 미성년자를 포함한 성적 장면을 촬영하는 것에 ‘가이드라인’이 필요하다는 업계의 문제제기가 많았거든요.

인티머시 코디네이터라는 직업을 개척한 선구자로 알려진 이타 오브라이언. 이타 오브라이언 홈페이지 제공 사진 크게보기

인티머시 코디네이터라는 직업을 개척한 선구자로 알려진 이타 오브라이언. 이타 오브라이언 홈페이지 제공

그는 <오티스의 비밀상담소>(섹스 에듀케이션)를 시작으로 <노멀피플>, <더그레이트> 등 다양한 작품에 참여했는데요. 인터뷰는 그중에서도 BBC·HBO 공동제작 드라마 <아이 메이 디스트로이 유>의 작업기를 상세히 소개합니다. 감독 겸 배우 미카엘라 코엘이 자신의 약물 성폭력 피해 경험을 다룬 이 작품은 경계가 불분명한 성적 동의 문제를 섬세하게 풀어냅니다.

드라마엔 약물 성폭력, 동성 간 성폭력, 성행위 도중 콘돔을 빼는 스텔싱 등 여러 성폭력 장면이 다수 등장합니다. 극중 인물들의 세계관 전체를 흔들 정도로 중대한 사건이지만, 성폭력 장면 자체는 감정적으로 과잉되지도, 극적으로 임팩트있는 사건으로 묘사되지도 않습니다. 일상의 순간들이 이어지다가 굉장히 애매하게 툭 등장하죠. 오브라이언은 이 시리즈의 탁월한 묘사 뒤에 여성 창착자와 스태프들의 치열한 논의가 있었음을 짚습니다.

제가 현장에서 프로듀서들에게 가장 먼저 말하는 건, 신체접촉이 있는 장면을 촬영할 때 ‘젠더적 동등함’이 확보되었는지를 고려하라는 거에요. 이성애 섹스 장면을 찍는 경우, 여성 배우는 남성의 시선(male gaze) 위에서 연기하는 상황이 되어버리기가 정말 쉬워요. 아주 취약한 상황에 홀로 놓이게 되는거죠. (...) 만약 여성 촬영감독이나 여성 조연출, 여성 조명 감독이 없다면, 단 한 명이라도 굉장한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말하고 싶어요.

- 할리우드의 섹스신을 안전하게 만드는 사람들, 인티머시 코디네이터의 필수업무 들여다보기(에스콰이어, 2020.7.13)

동의의 경계를 긋는 것의 어려움

창작자가 높은 수준의 성인지 감수성을 가지고 있다 해도, 동의의 경계를 긋는 문제는 결코 간단하지 않습니다. 인티머시 코디네이터의 전문성은 바로 이 지점에서 발휘됩니다.

예컨대 감독으로서의 코엘은 일부 성폭력 장면에서 대본에 없는 디테일을 추가하길 바랐어요. 이러한 디테일을 모든 배우들이 알게 되는 것을 원치 않았거든요. 이때 오브라이언은 “감독이 원하는 그림과 연출 의도를 미리 듣는 것이 내 역할”이라고 코엘을 설득합니다. 그는 코엘과 함께 어떤 그림을 원하는지, 정확히 어디를 만질지를 결정하고, 이를 비트 단위로 쪼갠 움직임으로 변환시킵니다. 이후 이러한 움직임 하나하나를 배우들과 조율해나가죠.

<아이 메이 디스트로이유>는 감독 겸 배우 미카엘라 코엘(가운데)이 자신의 약물 성폭력 피해 경험을 다룬 자전적 작품으로, 경계가 불분명한 성적 동의 문제를 섬세하게 풀어낸 수작이다. 웨이브 제공 사진 크게보기

<아이 메이 디스트로이유>는 감독 겸 배우 미카엘라 코엘(가운데)이 자신의 약물 성폭력 피해 경험을 다룬 자전적 작품으로, 경계가 불분명한 성적 동의 문제를 섬세하게 풀어낸 수작이다. 웨이브 제공

오브라이언은 “성적 자기결정권 침해를 동반한 장면일수록, 촬영의 물리적 구조를 고정시키고, 여러번의 리허설을 거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신체적 움직임을 예측 가능하게 만들어야 배우가 받게 될 정신적 스트레스가 최소화되고 감정에 몰입할 여지가 생긴다는 것이죠.

그는 “이런 장면에서는 피해자 역할을 맡은 배우의 심리만큼이나, 스스로 그곳까지 가야 하는 가해자 역할의 배우도 신경써야 한다”며 “초창기엔 스턴트 리허설만큼의 시간을 인티머시 리허설을 위해 확보하는데 어려움이 있었지만, 작품을 안전하게 만드는 즐거움을 (스태프들이) 공유하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일부 배우들은 인티머시 코디네이터의 개입이 연기의 자율성을 해친다고 반발합니다. 하지만 사전 동의 없는 베드신이 성폭력이라는 인식 하에서, 인티머시 코디데이터는 배우들을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가 됩니다.

[이진송의 아니 근데] 현장에서 벗기면 된다?···사전 동의 없는 베드신은 예술 아닌 성폭력

<아이 메이 디스트로이 유>에서 동성 간 성폭력 피해자를 연기한 배우 파파 에시에두는 “와호장룡같은 영화를 찍을 때 다른 사람의 머리가 안 날아가도록 도와주는 사람이 없으면 안되듯이, 인티머시 코디네이터도 마찬가지”라며 “이들 없이 이 정도 수위의 성적 접촉 장면을 어떻게 촬영했을지 상상조차 되질 않는다”고 했어요.

55년 전의 줄리엣에게 인티머시 코디네이터가 있었다면 어땠을까요. 적어도 지금의 할리우드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적극적으로 찾아가는 듯 보입니다. 지금 한국 사회는 이러한 질문에 어디까지 답을 찾았을까, 묻지 않을 수 없네요.

심윤지 기자 sharpsim@kh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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