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라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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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 라이트’는 무대 위 오직 한 사람이나 사물을 비추는 조명을 뜻합니다. 핀 라이트가 켜지는 순간,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고 참았던 숨을 터뜨리듯 환호가 터져 나옵니다. 이 열기를 즐기며, 또 감내하며 자신의 걸음을 만들어가고 있을 이들에게 좀 더 너그럽고 따뜻한 세상이 되길 바라봅니다. #핀라이트#홍진경



“홍진경입니다. 평생의 한(恨)을 풀고 싶습니다.”

날고 기는 예능인들의 전쟁터, 유튜브로 뛰어든 홍진경의 무기는 ‘다짜고짜 진심’이었다. 지난달 17일, 그는 유튜브 채널 ‘공부왕찐천재’ 시작을 알리는 동명의 콘텐츠에서 “배움의 때를 놓쳐… 지식을 향한 타는 목마름으로 나이 마흔다섯에 공부 콘텐츠를 시작했다”고 진지하게 호소한다. 라이트 형제 사진을 보고 “히틀러”라 답하거나 트와이스의 무대를 본 뒤 느낀 벅찬 감정을 “피가 거꾸로 솟는다” 표현했던 그의 과거 예능 속 장면들이 재소환되고, 말끔하게 빗어 올린 헤어스타일부터 손에 든 찻잔까지 애써 연출한 ‘공부왕’의 품위 대신 ‘몰라서 곤란한’ 홍진경의 진심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날고 기는 예능인들의 전쟁터, 유튜브로 뛰어든 홍진경의 무기는 ‘다짜고짜 진심’이었다. 카카오TV제공

날고 기는 예능인들의 전쟁터, 유튜브로 뛰어든 홍진경의 무기는 ‘다짜고짜 진심’이었다. 카카오TV제공

“어떤 해는 정신을 한 번도 못 보고 지나가도 정신을 모르던 시덥잖은 날들에 비하면 아름답다.”

그런가 하면 2019년 9월, 홍진경이 그의 친구 정신의 생일을 축하하며 인스타그램에 올린 짧은 편지에도 그의 진심은 형형하다. 싸이월드가 유행하던 2000년대 중후반, 홍진경이 종종 공개하던 짧은 글 속에 담긴 깊이 있는 통찰을 기억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가 적어낸 담백한 문장들과 ‘히틀러’ 사이의 간극이 당황스럽지만, 홍진경은 늘 이런 모양으로 ‘찐(진짜) 홍진경’이었다.

열일곱 나이로 슈퍼모델 선발대회에서 입상한 홍진경, 첫 TV 예능 출연에서 “장래희망은 포즈 잘 취하는 개그맨”이라고 답하던 홍진경, 뉴욕과 파리 패션계에 진출해 신인으로 돌아가 모델활동을 하던 홍진경, “어머니의 손맛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기 위해” 김치사업을 시작한 홍진경, 만화경처럼 다채로운 이력에 손을 뻗쳐온 홍진경의 진심이 이번엔 ‘공부’로 향했다. 마흔을 훌쩍 넘긴 나이에도 여전히 “배움으로 열릴 새로운 세상이 기대된다”는 홍진경을 지난 14일 화상 인터뷰로 만났다.

언제나 진심을 다해 살아온 그가
공부에 눈을 돌리게 된 이유



“아이를 키우다보니 공부라는 콘텐츠가 굉장히 절실할 수밖에 없었어요. 진정성과 맞닿았달까요.”

유튜브·카카오TV에서 공개되는 웹 예능 ‘공부왕찐천재’ 첫 에피소드, 홍진경은 “지식을 향한 타는 목마름으로 나이 마흔다섯에 공부 콘텐츠를 시작했다”는 진심 어린 호소글을 적어 올렸다. 카카오TV제공

유튜브·카카오TV에서 공개되는 웹 예능 ‘공부왕찐천재’ 첫 에피소드, 홍진경은 “지식을 향한 타는 목마름으로 나이 마흔다섯에 공부 콘텐츠를 시작했다”는 진심 어린 호소글을 적어 올렸다. 카카오TV제공

웹 예능 ‘공부왕찐천재’는 홍진경을 비롯한 ‘공부에 한 맺힌’ 연예인들이 정치인부터 유튜버까지 다양한 ‘공부왕’들에게 중학교 교과과정을 배워가는 ‘교육 예능’을 표방한다. 홍진경을 무작정 찾아와 ‘20분만 시간을 내달라’며 유튜브 콘텐츠를 제안했던 이석로 PD에게 홍진경이 역제안해 실현된 기획으로, 유튜브와 함께 콘텐츠가 공개되는 카카오TV에서는 공개 3주 만에 누적 조회수 1000만회를 넘어섰다.

“저 혼자였으면 굳이 교과 공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은 못했을 거예요. 고등학교 1학년 때 방송을 시작해 학교를 거의 못 갔지만, 교실에서 배우지 못한 것들을 사회생활에서 많이 배웠어요. 방송국에서 당대의 스타들을 만나면서, 해외에서 모델 활동을 하면서 값진 경험을 많이 했죠. 하지만 누구나 자신이 가보지 못한 길에 대한 목마름은 있잖아요. 그런 아쉬움 때문에 미술사 등 입시와는 상관없는 관심 분야를 꾸준히 공부해왔어요. 그런데 아이를 키우다보니 교과 공부에 대한 필요성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던 거죠.”

고등학교 1학년 때 방송을 시작한 홍진경은 교실에서 배우지 못한 것들을 사회생활을 통해 배웠다고 말한다. 사진은 1996년  5월 <기쁜 우리 토요일>에서  연기하는 그의 모습. 경향신문 자료사진

고등학교 1학년 때 방송을 시작한 홍진경은 교실에서 배우지 못한 것들을 사회생활을 통해 배웠다고 말한다. 사진은 1996년 5월 <기쁜 우리 토요일>에서 연기하는 그의 모습. 경향신문 자료사진

그의 오랜 ‘공부’와 별개로, 올해 12세가 된 딸 라엘양의 학교 공부를 도우며 느꼈던 어려움을 유튜브를 통해 해소했던 경험들이 ‘공부왕찐천재’의 배경이 됐다. “교과 학습으로 채널의 성격을 한정한 건, 적어도 제 아이나 시청자들이 성적 때문에 자존감에 상처 입고 ‘나는 못해’ ‘나는 꼴찌야’ 이런 생각은 안 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에서예요. 예능이라 생각하고 가볍게 보고 난 뒤, 공식 하나를 얻어갈 수 있는 그런 채널이 되면 좋겠어요.” ‘공부왕찐천재’에서는 홍진경과 연예인 학생들이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에게 일차 방정식을, 나경원 전 국민의힘 의원에게 김춘수의 시 ‘꽃’을, 방송인 장성규에게 수요·공급 곡선을 배우는 식의 수업이 이어진다. 끝없는 ‘오답 파티’와 당황하는 강사 모습에 정신 없이 웃다가 자신도 모르게 공부하고 간다는 댓글이 적지 않다.

모르는 걸
모른다고 말할 수 있는
내 자신이 좋다



예능은 웃음을 원하고, 홍진경의 다채로운 면모 중에서 굳이 ‘바보스러운’ 이미지를 강조하는 데 익숙하다. 하지만 JTBC <차이나는 클라쓰>에서 내놓던 날카로운 질문들, 탁월한 글솜씨, 오랜 다독 습관, 뛰어난 사업 수완 등을 볼 때면 홍진경은 오히려 ‘천재’ 쪽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홍진경, 천재냐 바보냐” 묻는 ‘공부왕찐천재’의 에피소드 제목이 눈에 띈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홍진경의 생각은 명료했다. “높은 학력이나 사회적 명망이 천재와 바보를 분류하는 기준이 될 수는 없는 것 같아요. 모든 사람들이 그렇듯 저도 어떤 면에서는 천재고, 어떤 면에서는 바보죠. 예를 들어 이번에 김춘수의 ‘꽃’과 함께 배운 도치법이나 공감각적 심상 같은 개념어는 몰라요. 진짜 백지 상태죠(웃음). 하지만 시가 지닌 아름다움을 포착할 수 있는 감수성과 지식은 충분히 갖고 있거든요.”

이 입체성을 모른 체하고 집요하게 그를 ‘바보’라 놀리는 예능의 관습에도 초연할 뿐이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은 저를 상처입히지 못해요. 모르는 걸 모른다고 말할 수 있는 제 자신이 좋고요. 제가 만약 그런 부분들에 자존심이 상했다면 절대로 이런 캐릭터와 콘텐츠는 만들지 못했을 거예요. 제가 교과서 상식에 무식한 게 사실이니까 상관없기도 하고, 그 외에 다른 것들을 잘 알고 있으니까요.”

유튜브·카카오TV 웹 예능 ‘공부왕찐천재’에서 홍진경이 중학교 경제 교과서에 나오는 수요·공급의 원리에 대한 문제를 풀고 있다. 카카오TV 제공

유튜브·카카오TV 웹 예능 ‘공부왕찐천재’에서 홍진경이 중학교 경제 교과서에 나오는 수요·공급의 원리에 대한 문제를 풀고 있다. 카카오TV 제공

무지는 될 수 있는 대로 감추고 앎은 가진 것 이상으로 과시하는 게 미덕인 시대, 홍진경이 ‘천재이자 바보’인 자신의 모습을 솔직하게 내보이는 데 익숙해진 까닭은 무엇일까. “사실 모른다는 게 뭐가 자랑이겠어요. 예능에서 퀴즈를 할 때마다 늘 진심으로 맞히고 싶었어요. 원래 방송에서 긴장을 잘 안 하는데, 하나라도 맞히고 싶어서 손에 땀을 다 쥘 정도였죠. 진솔한 제 모습을 보여드리는 것이 오랫동안 시청자분들께 사랑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해요. 얼마 전에 ‘공부왕찐천재’에서 지금까지 배운 걸 시험을 봤는데, 제가 제일 많이 맞혔어요. 재미가 좀 덜해지더라도, 최선을 다해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어요.”

태어났으니까, 열심히 산다
더 많은 걸 알게 되면,
지금껏 내가 살아온 세상이
얼마나 더 작게 느껴질까



“도전하고 싶지 않아요. 세상과 싸워본 적도 없고, 순응적인 사람입니다.”

모델이자 예능인, 사업가이자 유튜버. 종횡무진 활동 반경을 넓혀온, 그 끊임없는 도전의 동력을 물었더니 돌아온 뜻밖의 답이다. “태어났으니까 사는 거예요. 이왕 사는 김에 열심히 사는 거고, 너무 열심히만 살면 재미없으니까 마음 맞는 사람들과 재밌는 일을 벌이고요. 그렇게 벌인 일을 꾸역꾸역 해내면서 사는 것뿐이에요.”

인생을 건 뚜렷한 목표나 동기 없이도 홍진경의 삶은 내일에 대한 기대로 반짝반짝 빛난다. “영감을 건드려주는 책을 즐겨 읽어요. 책을 통해 멈춰 있던 감각을 건드려 영혼을 성장시키는 것이 좋아요. 그런데 요즘은 교과 공부를 하면서도 앎의 즐거움을 경험하고 있어요. 일차 방정식 문제를 풀고 새로운 희열을 느꼈거든요. 생애 처음으로 엉덩이 붙이고 앉아 학문에 깊이 빠지는 시간들을 가져보고 싶어요. 배움으로 열릴 새로운 세상이 굉장히 기대돼요. 더 많은 것들을 알게 되면, 지금껏 내가 살아온 세상들이 얼마나 작게 느껴질까 싶어서요.”

“건강이 허락하는 한 즐겁게, 큰 욕심 없이 유쾌하게 살고 싶다”는 홍진경이지만 ‘공부왕찐천재’에 대한 욕심만은 분명하다. “사람들이 웃음보다는 수업이 듣고 싶어서 제 채널에 들어오도록 만드는 게 목표예요. 웃음은 보너스죠. ‘거기 수업 괜찮더라, 웬만한 인터넷 강의보다 낫다’는 평가를 받고 싶어요. 저도 ‘공부 준비’ 콘텐츠만 4부째 이어나갈 정도로 공부가 힘들지만(웃음) 앞으로 어려운 개념들도 최대한 쉽게 풀어서 설명해 드리려고 해요. 많은 분들이 위로와 공감을 얻으며 진짜 ‘공부왕’으로 거듭나시면 좋겠습니다.”


김지혜 기자 kimg@kh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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