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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11월 4일자 플랫 뉴스레터에 게재된 글입니다. 뉴스레터 전문에서는 한 주 간 있었던 젠더 뉴스, 이에 대한 플랫 독자들 반응 등 더 많은 이야기를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백래시의 소음에서 반 보 물러나 여성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면, 매주 금요일 7시 플랫 뉴스레터를 구독해주세요.(▶구독링크 바로가기) 혹시 구독 링크가 연결되지 않으면 괄호 안의 주소(https://bit.ly/3zP21Hg)로 들어오실 수 있습니다.



‘미투의 도화선’이 된 하비 와인스타인 사건 기억하시나요. 사실 와인스타인의 성착취에 대한 소문은 2017년 뉴욕타임스 보도 이전부터 할리우드를 떠돌았습니다. 하지만 피해자 대부분은 비밀유지조항에 묶여있었고, 업계 거물인 와인스타인의 이름은 가해자로 호명되지 못했습니다. 어렵게 용기를 낸다 해도 피해자들의 목소리는 ‘증거가 없다’며 매도되기 십상이었습니다.

뉴욕타임스 기자인 조디 캔터와 메건 투히는 앞선 사례를 보면서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습니다.

“저널리즘의 영향력은 특정성에서 나온다. 이름, 날짜, 증거, 그리고 패턴이다.”

실명을 밝힌 피해자들의 증언, 구체적인 증거가 뒷받침된 기사여야만 더 많은 피해자를 수면 위로 끌어내고, 그의 가해 사실을 제대로 드러낼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죠. 잘 훈련된 기자들이 수 개월간의 에너지를 쏟아 만들어낸 보도의 파급력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대로입니다.

📌할리우드에 떠돌던 루머를 ‘미투의 도화선’으로 만든 기자들

미국 피트니스 업계의 조직적 성착취를 폭로한 지난달 28일 워싱턴포스트 탐사보도팀 기사. 워싱턴포스트 홈페이지 갈무리

미국 피트니스 업계의 조직적 성착취를 폭로한 지난달 28일 워싱턴포스트 탐사보도팀 기사. 워싱턴포스트 홈페이지 갈무리

지난 28일 워싱턴포스트 탐사보도팀의 기사는 ‘좋은 젠더기사’는 ‘좋은 기사’임을 증명한 또 다른 사례입니다. 보도는 “미국 여성 프로 보디빌딩 선수들이 지난 15년간 업계 주요 관계자에게 성적으로 착취 당했다”는 의혹을 제기합니다. 피해자 9명의 인터뷰를 포함해 제3자인 연맹 관계자의 증언, 계약서 등 각종 문건, 가해자 반론까지 충실히 담았습니다.

가해자로 지목된 이는 국제보디빌딩연맹(IFBB) 짐 매니언 회장(78)의 아들 J M 매니언과 그 측근들입니다. 이들은 여성 선수들에게 누드 사진을 찍도록 강요하고, 이를 J M이 운영하는 소프트코어 포르노 사이트에 업로드했어요. 2008년 올림피아 피규어 부문 우승자 젠 게이츠를 포함해, 확인된 피해자만 200명이 넘습니다. J M이 자신에게 협조적인 선수들을 위해 성적을 조작했다는 관계자들의 폭로도 나왔고요.

워싱턴포스트 탐사보도팀이 입수한 보디빌더 맨디 헨더슨과 J M 매니언 프로덕션과의 계약서. 워싱턴포스트 홈페이지 갈무리.

워싱턴포스트 탐사보도팀이 입수한 보디빌더 맨디 헨더슨과 J M 매니언 프로덕션과의 계약서. 워싱턴포스트 홈페이지 갈무리.

J M의 패턴은 와인스타인의 패턴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누드 촬영 제안은 경기 하루 혹은 이틀 전 이루어졌습니다. 대회만을 위해 수개월 간의 식이요법과 강도 높은 운동을 견뎌 온 선수들이 가장 취약해진 순간을 노린 것이죠.

WP가 만난 피해자들은 “제안을 거부하는 순간 대회에서도 우승할 수도 없고 선수 생활을 이어갈 수도 없을 것 같은 압박감을 느꼈다”고 입을 모읍니다. 광고 계약이나 잡지의 표지 모델 기회를 얻으려면 프로 선수가 되어야 하는데, 프로 선수 자격증이라고 할 수 있는 프로 카드를 발급하고 선수들의 매니지먼트를 담당하는 것이 바로 J M이었거든요.

J M은 워싱턴포스트의 취재 요구를 거부했습니다. J M의 촬영에 동석했던 관계자는 선수들이 누드 촬영에 ‘동의’했다고 주장합니다. 촬영장에 어떤 의상을 가지고 오느냐는 “전적으로 선수의 자유 의지에 따라 결정됐다”는 것이죠.

하지만 익명을 요구한 한 피해자는 완전한 누드 촬영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의사를 명시적으로 밝혔음에도 촬영을 강요받았고, 이를 거부하는 것은 ‘직업적인 자살(Career Suicide)’과 다름없었다고 증언합니다. 실제로 J M의 제안을 거절한 후 몇 년을 ‘무수입 상태’로 보냈다는 선수들도 있었습니다.

2019년 남아공 요하네스버그 샌튼 컨벤션 센터에서열린 아놀드 스포츠 페스티벌 아프리카 2019에서 여성 보디빌더들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게티이미지

2019년 남아공 요하네스버그 샌튼 컨벤션 센터에서열린 아놀드 스포츠 페스티벌 아프리카 2019에서 여성 보디빌더들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게티이미지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수영 금메달리스트이자 스포츠 분야 여성 권리 옹호단체 ‘챔피언 위민’을 운영하는 변호사 낸시 호그스헤드메이카는 “보디빌딩은 주관적인 평가 기준으로 인해 심사위원의 영향력이 막중하다”며 “상대방이 당신의 상사이고, 당신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면 그것은 동의가 될 수 없다”고 지적합니다.

워싱턴포스트 취재팀은 이러한 ‘구조적 성착취’가 가능했던 배경으로, 피트니스 업계 내 만연한 성차별을 지목합니다. 연맹 핵심관계자와 심사위원 대부분은 남성이고, 선수들의 대회 성적과 경제적 안정성은 전적으로 이들 손에 달려있습니다. 가장 권위 있는 보디빌딩 대회 중 하나인 올림피아의 지난해 우승 상금은 남성이 67만50000달러(9억6390만원), 여성이 6만달러(8566만원)로 10배 이상 차이가 납니다.

취재팀은 2009년 ‘비키니 종목’ 신설을 비롯해 여성 보디빌더들을 ‘성적 대상화’하는 경향이 더욱 더 심해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기사 말미, 피트니스 업계에 환멸을 느껴 은퇴를 결심했다는 게이츠는 비키니 선수의 코치 제안을 거절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온라인으로 비키니 대회를 처음 본 순간, 제가 이 어린 여성들과 일할 방법은 도저히 없겠다 싶었어요.이들에게 어떻게 턴을 하고 어떻게 엉덩이를 내밀라고 말하지는 못하겠더라고요. 그냥 도덕적으로, 제가 그 일을 할 수 없었어요. 제가 그만두고 상황이 훨씬 더 나빠진 것 같아요. 업계를 빠져나왔다는 사실이 신의 은총처럼 느껴질 정도로요.”

심윤지 기자 sharpsim@kh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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