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들의 플랫한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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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랫팀

여성 서사 아카이브

플랫(flat)의 뜻은 다채롭습니다. 평평하거나, 딱 떨어지고 반듯하며, 균질한 사물을 꾸미는 데 붙이기도 하지만 반음 낮고, 단조로운 상태도 표현합니다. 플랫이 수식하는 단어만큼이나 다양한 모습의 여성들을 지지하고 응원합니다. 추석을 맞아 ‘플랫’의 창간기획 [언니들의 플랫한 생활] 시리즈를 다시 꺼내 봅니다.



언니들의 플랫한 생활. 7화


엄마 이정희씨(가명)와 딸 김민지씨(가명)는 2년 차 ‘동거인’이다. 딸이 서울로 대학을 가면서 떨어져 지낸 후 10년 만에 같이 살게 됐다. 여느 모녀 사이처럼 매일 툭탁대며 다투지만 딸은 이제 적어도 엄마에게 “왜 아빠 같은 사람과 결혼했냐”고 묻지 않는다. 엄마도 딸에게 “왜 연애는 안 하느냐”고 타박하지 않는다.

일러스트 | 이아름 areumlee@khan.kr

일러스트 | 이아름 areumlee@khan.kr

사실 두 사람은 예전부터 마냥 좋은 사이는 아니었다. 민지씨는 엄마에게서 벗어나고 싶었다.

“어릴 때 ‘엄마처럼 살기 싫다’고 뻑하면 악을 썼던 거 같아요. 가족들과 최대한 떨어져 혼자 사는 것이 꿈이었으니까요.”

그래서 대학 입학과 함께 독립한 후에는 1년에 두 번, 설날과 추석 때만 가족과 만났다. 직장도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구했고, 혼자 사는 소원도 이뤘다. 이정희씨는 그런 딸에게 집에 일이 생길 때면 전화했다. “너희 아빠가…”라고 시작하는 신세 한탄이 대부분이었다. 민지씨가 엄마의 푸념에 “그 소리 지겹다”고 한소리를 해버린 날, 정희씨는 가슴에 돌덩이가 ‘쿵’ 하고 내려앉은 느낌이었다고 했다. 이후 딸에게 먼저 전화를 하지 않았다.

그렇게 소원해진 모녀로 지내던 어느 겨울. 정희씨가 연락도 없이 민지씨가 자취하는 집으로 찾아왔다.

“아빠가 바람을 피우는 것 같아.” 30년간 주부로 가족들을 위해 일했던 엄마. 민지씨는 그날, 엄마의 이혼을 돕기로 마음먹었다.

서울가정법원이 위치한 서울 서초구 양재동으로 갔다. 건물마다 ‘이혼 전문’ 간판을 단 변호사 사무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었다.

“엄마는 아침이면 ‘이혼하고 싶다’고 했다가, 밤에는 ‘못하겠다’고 했어요. 그래서 ‘일단 변호사만 만나보자’고 엄마랑 변호사 사무실을 찾았죠.” 사정을 들은 변호사가 “그동안 힘드셨겠다”고 한마디 하자 엄마는 아이처럼 울었다. 한 시간가량의 첫 상담. 10만원을 내고 명함을 받은 뒤 사무실을 나왔다. 그 후로도 사무실 몇 군데를 들러 상담만 받고 나왔다.

정희씨가 ‘이혼하겠다’는 결심을 굳힐 때까지, 꼬박 1년이 걸렸다.
엄마가 마음을 다잡은 날,
민지씨는 변호사에게 500만원을 입금했다.



“엄마를 이렇게 살게 해선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둘이 살 집도 새로 구했다. 혼자 살던 월세방에서 전세대출을 받아 신축빌라로 옮겼다. 민지씨가 청년 가구 자격으로 전세보증금 90%를 대출받았다. “제가 직장이 있어서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어요. 3년간 일해서 모아둔 3000만원을 전세자금이랑 변호사비로 다 썼죠. 아깝진 않았어요.(웃음)”

김민지씨 제공

김민지씨 제공

이혼 소장이 아버지에게 도착한 날. 친가 식구들은 엄마에게 “소송을 취하하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했다. “미쳤다”는 모진 소리도 날아왔다. 아버지는 이혼을 거부했고 소송이 시작됐다. 변호사는 딸에게 사실 확인서를 써달라고 했다. 자식 입장에서 부모가 이혼해야 하는 이유를 사실을 바탕으로 쓰면 된다고 했다.

30년이 넘는 정희씨의 결혼 생활이 A4 용지 두 장에 담겼다. “써놓고 보니 ‘이정희’는 없고 ‘민지 엄마’만 잔뜩이었어요. 엄마가 스스로 권리를 찾겠다고 시작한 이혼이잖아요. 그것이 또 다른 ‘투쟁’이 된 것 같아 슬펐지만 엄마가 자신의 이름을 찾았으면 했어요.”

정희씨는 어릴 때 잘 먹지 않아 몸은 또래보다 한참 작았지만, 똑똑하기로 동네에 소문이 났다고 했다. 책이 좋고 글이 좋아 대학에서 국어국문학을 공부하고 싶었지만 “글쓰는 직업은 인기 없어서 시집을 못 간다”며 담임 선생님이 원서를 써주지 않아 장학금을 받고 법대에 입학했다. 법대에 가서도 “잘난 여자는 시집 못 간다”는 소리를 들었다. 사법시험을 볼지, 취업을 할지 고민하던 정희씨에게 부모님은 “선을 보라”고 했고, 그 말을 거역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렇게 만 스물 셋에 결혼을 했다. 상견례 자리에서 예비 시부모는 “결혼하면 살림만 해야 하고, 반 년은 시댁에서 살라”고 했다. 식을 올리고 고향인 서울을 떠나 남편 따라 지방으로 간 정희씨는 반 년이 아닌 10년을 시댁에서 살았다. 첫째가 초등학교 3학년이 돼서야 분가한 곳도 시댁에서 겨우 300m 떨어진 집이었다.

“밥할 줄 모른다고 시어머니한테 혼나고, 밥하다 말고 책 읽는다고 시아버지한테 혼났어요. 아침 차리고 청소하고 점심상 보고 청소하고 저녁 밥 짓고 청소하고…. 결혼하고 1년 만에 첫 아이를 낳았는데 딸이라고 하니까 시아버지는 병원에도 오시지 않았어요. 이듬해 한 살 터울로 아들을 낳았는데, 그땐 병원에서 제일 큰 독방에서 산후조리를 했죠.” 정희씨는 아이 둘을 키우며 살림도 전담했다. 남편이 일자리가 없었던 몇년간은 동네에 학원을 차려 돈도 벌었다. 친정에는 ‘힘들다’는 소리도 한마디 못했다. 다들 그렇게 사는 줄 알았다.

민지씨는 그 시절, 엄마가 너무 미웠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민지씨의 이름을 일곱살이 될 때까지 한 번도 부르지 않았다. 그저 “이X” “저X”이었다. 식구들 누구도 그런 할아버지를 말리지 않았다. 남동생이 몸이 약한 것을 두고 어른들은 “첫째가 자궁 기운을 다 빨아들여 기가 약하다”고 했다. 정희씨는 똑같은 잘못을 해도 혼자만 혼나는 딸이 가여워서 어른들 앞에선 일부러 매섭게 야단을 쳤다.

“제가 차별당해도 엄마는 그냥 방관했어요. 그래서 엄마를 오랜 시간 미워했던 거 같아요.” 정희씨는 말한다. “저도 그때 나이가 어렸잖아요. 시댁 식구들이 너무 무서웠어요. 남편도 아무 말을 못했죠. 그때로 돌아간다면 ‘내 딸에게 그러지 말라’고 소리를 지르고 싶어요.”

그래도 딸을 가장 잘 이해해준 것은 엄마였다. 취업준비생이었던 딸에게 남편이 “시집이나 가라”고 할 때마다 정희씨는 “여자도 직업이 있어야 한다”며 싸웠다. 어릴 적 자신의 꿈이기도 했던 글쓰는 직업. 그 꿈을 딸인 민지씨가 이뤄냈을 때 “쓰고 싶은 것, 마음껏 쓰고 살라”며 진심으로 축하했다.

김민지씨 제공

김민지씨 제공

지난해 추석은 엄마와 딸이 처음으로 둘만 보낸 첫 명절이었다. 추석 당일 정희씨는 납골당에 가자고 했다. “결혼하고 처음으로 명절 당일에 친정 부모님을 뵈러 갔어요. 두 분 다 돌아가시고 난 뒤에야…. 눈물이 나더라고요.” 그러고 나서 두 사람은 즉흥적 여행을 떠났다. 인천 영종도에서 해물탕에 소주를 마시고, 멍하니 바다를 봤다. 호텔에서 ‘호캉스’를 즐기고, 외식을 한 뒤 영화를 봤다.

정희씨의 ‘설거지 없는 첫 명절’이었다.



“엄마랑 영화 <82년생 김지영>을 봤어요. 둘이 엄청 울었죠. 극중에 엄마 김미숙과 딸 김지영 중에 누가 더 고생한 세대인지 싸우는 사람들이 있던데 이해가 안돼요. 아마 딸들은 알 거예요. 엄마의 엄마에게서 엄마, 그리고 엄마에게서 딸로 이어지는 이 굴레는 누가 더 힘들고 덜 힘든지를 따질 필요가 없다는걸요. 결국 모두 한 덩어리잖아요.”

딸은 엄마의 하소연이 이어질 때마다 “차라리 그냥 이혼하라”고 소리쳤고, 엄마는 “너희 남매 결혼식은 어떻게 하고 이혼을 하냐”며 속상해했다고 한다.

“예전엔 엄마의 이 말이 이해가 안됐지만 지금은 엄마가 왜 그렇게 망설였는지 알아요. 이혼 가정을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은 여전히 좋지 않죠. ‘딸 결혼시킬 때 사윗감을 보는 기준은 오직 부모’라는 말도, ‘자식은 부모 팔자 닮는다’는 말도 아무렇지 않게 하잖아요.”

김민지씨 제공

김민지씨 제공

정희씨의 이혼 소송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남편은 여전히 자신의 외도를 두고 ‘한 번의 실수’라고 했다고 한다. 평생 가족의 그림자처럼 살았던 그에게 ‘실수’라는 단어가 곪아버린 마음에 어떤 비수로 꽂힐지 아는 사람은 딸, 민지씨뿐이다.

“30년 동안 자식 키우고 시집살이만 하다보니 주변에 남은 친구도, 가족도 없었어요. 집을 나오며 생각나는 건 딸의 얼굴뿐이었어요. ‘능력만 있으면 딸한테 이런 부담 안 주는 건데’라는 생각을 수십번도 더 했죠.” 정희씨는 3개월 전부터 돌봄 노동을 시작했다. 생활비에 보태기 위해서다. 두 사람은 지금의 관계에 대해 “누가 누구의 짐이 되고, 누가 누구의 짐을 지는 일은 없다”고 했다.

변호사를 선임하고 소송 과정에서 엄마와 딸은 더 할 일이 딱히 없었다. 오히려 ‘같이 사는 법’을 배우는 게 더 급하다. 엄마와 딸에서 동거인이 된 두 사람은 모든 생활 수칙을 처음부터 다시 정했다. 일어나는 시간부터 잠드는 시간까지 달라도 너무 달랐다. 민지씨는 엄마의 TV 채널 선택 취향을 존중하기로 했고, 정희씨는 딸이 퇴근한 뒤 자신만의 시간을 갖는 걸 이해하려고 노력 중이다. 또 서로가 부정적인 말은 쓰지 않기로 약속했다. 엄마와 딸 사이였지만 몰랐던 각자의 모습도 발견했다.

“딸은 생각보다 더 독립적이더라고요. 때로는 너무 냉정해 놀랄 때도 있어요.” “예전에 엄마는 깊은 바닷속에 잠겨있는 사람 같았거든요. 근데 지금 엄마는 참 재밌는 사람이에요.”

김민지씨 제공

김민지씨 제공

민지씨 친구들 중에는 엄마의 탈혼기를 듣고 자신도 엄마의 탈혼을 돕고 싶다며 조언을 구하는 또 다른 딸들이 많다고 했다.

“친구들이 저한테 상담을 요청하면 가장 중요한 건 엄마의 의지라고 말해줘요. 그다음은 본인, 딸의 의지 같아요. 엄마만 결심한다고, 자식만 결심한다고 선뜻 이혼하라는 말을 할 수는 없어요. 돈도 많이 들고, 솔직히 힘들긴 하니까요.”

모녀가 또다시 한바탕 싸운 날. 출근한 딸에게 엄마가 보낸 문자메시지를 민지씨가 보여줬다. “네가 싫다고 해도 영원히 옆에서 지지고 볶으면서 살 거야. 미안하고 사랑해, 딸.” 답장은 “나도 미안해 엄마. 저녁에 웃으면서 봐”라고 보냈다.

세상에서 제일 가깝지만, 가장 멀었던 두 사람, 엄마 정희씨와 딸 민지씨는 동거인으로 사는 법을 새로 익히고 있었다.


이유진 기자 yjleee@khan.kr

“엄마는 딸과 동거인이 되면서 이름을 찾았다”[플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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