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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서사 아카이브

플랫팀이 새로운 시선과 시도로 완성된 콘텐츠를 ‘플랫pick’으로 추천합니다. 여성의 시각으로 세상을 담은 영상과 서적 등을 소개합니다. 이번 ‘pick’은 KBS 아카이브 다큐멘터리 <모던코리아>의 10번째 에피소드인 ‘짐승’편입니다.



납치·인신매매 등 여성 대상 범죄가 빈번하던 1990년대 초반 ‘짐승’은 성폭력 가해자를 지칭하는 몇 안 되는 단어 중 하나였다. 하지만 사회구조적 문제인 성폭력을 남성의 동물적 본능 탓으로 축소한다는 문제제기에 최근에는 그 쓰임이 줄어드는 추세였다.

KBS 아카이브 다큐멘터리 <모던코리아>의 10번째 에피소드이자 성폭력특별법 제정 당시를 다룬 ‘짐승’은 이 단어를 다시 공론장으로 불러왔다. “나는 사람이 아니라 짐승을 죽였습니다.” 9세였던 자신을 성폭행한 이웃집 아저씨를 찾아 21년 만에 살해한 김부남씨가 1991년 최후진술에서 한 말이다.

‘짐승’을 제작한 정재은 감독은 지난 26일 전화 인터뷰에서 “과거 신문 보도에서 이 말을 보자마자 제목으로 써야겠다고 결심했다”고 했다. 그는 “시대의 야만과 폭력을 고발하는 단어”로서의 ‘짐승’에 주목한다.

모던코리아 <짐승>편을 제작한 정재은 영화감독

모던코리아 <짐승>편을 제작한 정재은 영화감독

“사이코패스라는 말도, 변태성욕자라는 말도 없었던 시대에 짐승은 그녀가 할 수 있는 최고 수준의 욕이었어요. 다큐를 준비할 때 ‘성폭력 가해자는 짐승이나 괴물이 아니라 우리 주위의 평범한 이웃’이라는 우려를 전해주신 분도 있었고, 저도 동의해요. 하지만 적어도 김씨에겐 평범한 이웃이 아니었어요. 몇십년에 걸쳐 자신의 삶을 파괴한 사람이었죠.”

‘짐승’은 KBS PD가 아닌 영화감독이 제작한 최초의 <모던코리아> 에피소드다. 뉴스나 시사프로그램이 주를 이루는 다른 에피소드와 달리, 20편에 달하는 드라마 장면들로 러닝타임 대부분을 채웠다. “여성들의 목소리가 담긴 영상을 찾기가 그만큼 어려웠거든요. 성폭력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순결을 잃었다는 이유로 가해자와의 결혼을 강요당하는 여성들의 현실은 드라마에만 담겨 있었죠.”

KBS 아카이브 다큐멘터리 <모던코리아>의 10번째 에피소드이자 성폭력특별법 제정 당시를 다룬 ‘짐승’편은 시대적 야만을 드러내는 단어로서의 ‘짐승’에 주목한다. <짐승>은 20편에 달하는 드라마 장면들로 러닝타임 대부분을 채웠다. 어린 시절 자신을 성폭행한 양아버지를 살해한 ‘김보은·김진관 사건’(1992) 역시 드라마로 만들어졌다. 이 사건은 1991년 김부남 사건과 함께 성폭력특별법 제정의 계기가 된다.  KBS 모던코리아 제공

KBS 아카이브 다큐멘터리 <모던코리아>의 10번째 에피소드이자 성폭력특별법 제정 당시를 다룬 ‘짐승’편은 시대적 야만을 드러내는 단어로서의 ‘짐승’에 주목한다. <짐승>은 20편에 달하는 드라마 장면들로 러닝타임 대부분을 채웠다. 어린 시절 자신을 성폭행한 양아버지를 살해한 ‘김보은·김진관 사건’(1992) 역시 드라마로 만들어졌다. 이 사건은 1991년 김부남 사건과 함께 성폭력특별법 제정의 계기가 된다. KBS 모던코리아 제공

다큐는 성폭력특별법 제정의 계기가 된 ‘김부남 사건’에서 시작해 한국 최초의 성희롱 관련 소송이었던 ‘신 교수 사건’의 1심 판결에서 끝을 맺는다. ‘반성폭력 투쟁이 남녀 갈등을 유발한다’는 논리, 신 교수 사건 피해자의 발언 등을 보면 “달라진 것이 없다”는 좌절감이 밀려온다.

“사실 ‘말도 안 되는 발언’을 하는 영상은 더 많았어요. 하지만 관객들에게 무엇을 보여줄까 고민될 땐 여성을 떠올렸어요. 우리가 지금 서 있는 자리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게 아니라 아주 오랜 기간에 걸친 투쟁의 역사 속에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성폭력특별법 제정은 온전히 여성들의 힘으로 만들어낸 최초의 제도적 성과였으나 이 사건을 다룬 공적 기록은 많지 않았고 단신 뉴스로만 짧게 보도되는데 그쳤다. KBS 모던코리아 제공

성폭력특별법 제정은 온전히 여성들의 힘으로 만들어낸 최초의 제도적 성과였으나 이 사건을 다룬 공적 기록은 많지 않았고 단신 뉴스로만 짧게 보도되는데 그쳤다. KBS 모던코리아 제공

진보와 퇴보를 반복해 온 30년, 정 감독은 절망보다 희망에 무게를 둔다. “저는 나아졌다고 생각해요. ‘모던코리아’의 핵심은 법과 권리라는 점에서 여성들의 법제화 투쟁은 중요해요. 남녀고용평등법은 시대의 필요를 반영한 측면이 있었지만, 성폭력특별법은 온전히 여성들의 힘으로만 만들어낸 최초의 성과였어요. 이후로도 개정에 개정을 거듭하며 여성들의 목소리가 법에 반영되고 있고요.”

여성들의 투쟁에 대한 부실한 기록을 볼 땐 “여성들이 주체가 된 기록의 필요성을 절감한다”고 했다. “역사가 방대한 하드디스크 안에 내장된 기록이라면 아카이브 다큐멘터리는 ‘디스크 조각 모음’에 해당해요. 이러한 정리 작업을 해주지 않으면 역사는 특정한 사람들만의 기록으로 치우치게 될 거예요.”


심윤지 기자 sharpsim@kh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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