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후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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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랫팀

여성 서사 아카이브

퇴근 후는 온전히 나를 위한 회복의 시간입니다. 일상에 지쳐 쉬는 방법을 잊은 당신에게, 경향신문 여성 기자들이 퇴근 후 시간과 주말의 일상을 공유하는 [퇴근후, 만나요]를 연재합니다. 누군가의 사소한 일상이 영감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퇴근 후 만나요] 나 지금 바빠 생각 중이야



태희 : 나 지금 바빠. 생각 중이야.

태희의 오빠 : 그게 노는 거지 뭐야?

영화 <고양이를 부탁해>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가만히 바쁠 수 있다. 노는 것과 바쁜 것이 대치되지 않을 수도 있다. 창가에 앉아서 생각하는 태희는 세상 제일 여유로워 보이는데 사실은 누구보다 바쁘고 그걸 논다고 표현하면 간편하겠지만 정작 놀고 있는 당사자는 그닥 즐겁지 않아서. 즐겁지 않은 놀이를 놀이라고 할 수 있는지. 그저 태희는 태희의 일을 하고 있을 뿐이다. 숨막히는 스위트홈의 한복판에서 꾸역꾸역 만들어 낸 자기만의 방에서 벌이는 일이기에 바쁘든 놀든 타인을 납득시킬 필요도 없다.

어쩌면 그게 핵심이다. 납득시킬 필요가 없다는 것. 나는 퇴근 후에 그런 일로 가만히 바쁘다.

나 지금 바빠 생각 중이야[플랫]

좋은 아이디어는 샤워할 때 가장 많이 떠오른다는 얘기가 있다. (근거도 통계도 없는.. 그냥 썰이다) 그리고 샤워하고 나오면 잊어버린다. 아 중간에 뛰쳐나와 메모해둘 걸! 하는 처절한 후회 대신 까먹었네 아쉽다, 하는 옅은 미련으로 남는 이유는. 그래도 되니까. 책임 질 필요 없으니까. 느슨한 긴장감이 허용되는 시공간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라 그렇다. 가끔은 이런 미련마저 짜릿하다.

비단 샤워할 때뿐만이 아니다. 의자에 앉아 책상 위에 발을 올리고 넋 나간 사람처럼 과자를 씹으면서, 식탁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빈 깡통을 목격하고 그 출처를 반추하면서, 세제가 끈적하고 새파란 모양으로 세탁기에 흘러들어가는 광경을 바라보면서. 한심하지만 나름 기발한, 그렇지만 언제 잊어버려도 큰 타격은 없는 생각들을 머릿속에 주워섬긴다.

<고양이를 부탁해> 속 태희는 창가에 앉아서 생각을 한다. 세상 여유로워 보이지만 사실은 누구보다 바쁘다. 엣나인필름 제공

<고양이를 부탁해> 속 태희는 창가에 앉아서 생각을 한다. 세상 여유로워 보이지만 사실은 누구보다 바쁘다. 엣나인필름 제공

이건 오래된 습성이자 퇴근 후의 특권이다. 공상 혹은 망상 혹은 상상을 무방비하게 잊어버릴 수도, 고의로 흘려보낼 수도, 기록해서 기억할 수도 있다. 기록은 ‘생각하느라 바쁜’ 마지막 단계이고 그걸 하나의 새로운 세계로 확장하는 최초의 시도이다. 기록엔 여러 종류가 있겠지만, 주로 쓴다. 선과 면과 색으로 그려보고도 싶고 멜로디로 만들어 보고도 싶지만 불행히도 재능이 없다. 쓰고 싶어서 쓰는 게 아니라 쓸 수밖에 없어서 쓴다.

글쓰기는 끔찍하게 귀찮고 상상 이상으로 즐겁다. 각 잡고 쓰지 않는다. 이건 머릿속에 가득 찬 상념을 해소하는 출구이니까. 헛소리의 포맷으로 ‘막’ 쓰는 게 가장 적합하다. 그렇게 털어낸 결과물을 조금 시간이 지난 후 들여다보면 신기하게도, 그 안에 내가 있다.

생각에도 공사 구분이 필요하다. 수습 교육을 받던 때 편집국장과의 대화 자리에서 딴생각에 빠져 낙서를 하다가 걸려서 혼났다. 반숙이

생각에도 공사 구분이 필요하다. 수습 교육을 받던 때 편집국장과의 대화 자리에서 딴생각에 빠져 낙서를 하다가 걸려서 혼났다. 반숙이

이 취미─생각하기─의 장점은 명확하다. 도구가 필요 없다는 것. 아무거나 끌어다 쓰면 된다. 일하면서 보고 들은 스펙터클, 혹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미지의 무언가, 지금 당장 눈앞에 떨어져 나를 거슬리게 하는 빵 부스러기까지 모든 것이 빅뱅의 시작점이 된다.

굳이 물불 찾아가지 않아도 잘만 멍 때리는 게 나름의 재능인데. 때로는 반성해야 할 무책임이기도 해서. 퇴근 전후를 정교하게 갈라 뇌를 세팅하려고 노력은 한다. 내게도 프로페셔널에 대한 일말의 선망이 있다. 자꾸만 빈틈을 찾아 흐물흐물 가라앉거나 바람 빠진 풍선처럼 경박하게 휘날리는 생각들을 부여잡고 계획… 디테일… 근성…을 되뇌이는 것이다. 이건 품이 많이 들어가는 작업이다.

퇴근했다. 이제 모든 시간 낭비에 명분이 생긴다. 세 시간 동안 침대에 누워 유튜브를 보든, 보고 나서 후회할 걸 알면서도 또 공포 영화를 틀든, 발에 물집이 잡힐 때까지 미련하게 걷다가 길을 잃든, 기껏 해놓은 운동이 무색해지게 술을 마시든. 결국 이 시간을 토대로 내가 생각을 하고 생각이 터져나갈 때 즈음 무언가를 쓸 걸 나는 안다. 그러니 뭐, 지금 당장 시간 낭비 좀 하면 어떤가.

태희 : 나 지금 바빠. 생각 중이야.

태희의 오빠 : 그게 노는 거지 뭐야?

나 : 모르면 가만히 있어라.

반숙이
사회부 기자. 덜 익었거나 안 익을 사람. INT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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