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부터 살려야 한다

최희진 스포츠부

2018년 쇼트트랙 심석희가 조재범 코치에게 수년간 폭행·성폭행을 당했다고 공개하자 스포츠계 피해자들의 폭로가 줄을 이었다. 당시 ‘미투(MeToo·나도 고발한다)’ 운동 바람이 불었고 문재인 대통령도 체육계 폭력·성폭력 엄단을 주문했던 터라 숨죽이고 지내던 피해자들이 용기를 낼 수 있었다.

최희진 스포츠부

최희진 스포츠부

하지만 언론의 관심이 미치지 않는 종목에선 구태가 되풀이되고 있었다. 철인3종경기 최숙현은 경주시청 감독과 자칭 ‘팀 닥터’, 선배들의 폭언과 폭행에 시달렸다. 그도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지난 2월 경주시청에 민원을 제기했고, 3월 검찰에 가해자들을 고소했으며 4월 대한체육회에도 신고했다. 그러나 누구도 최숙현의 고통을 덜어주지 못했다. 그는 지난달 26일 스스로 삶을 저버렸다. 1998년생, 향년 22세. 아까운 목숨이 이렇게 스러졌다.

이 죽음이 공론화된 후 대한철인3종협회의 부적절했던 대응이 세상에 알려졌다. 협회는 지난 2월 최숙현 사안을 인지하고도 적극 조사하지 않았다. 진상 파악은커녕 주요 가해자인 김규봉 감독과 여자선배 장모씨가 2020 도쿄 올림픽 출전권을 획득할 경우 포상금을 지급하겠다고 결의했다.

협회가 올림픽 출전과 메달 획득을 위해 가능성 있는 선수를 지원하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올림픽만 바라보고 4년을 버티는 선수들의 꿈과 노력도 폄훼할 수 없다. 하지만 한 선수가 올림픽 출전권에 가장 근접했다는 게 다른 선수들에게 가혹행위를 해도 된다는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다른 한편으로는 국가가 체육인들에게 국제대회 선전을 요구했던 것도 사실이다. 메달을 ‘국위 선양’의 도구로 여겨왔다. 금메달은 대서특필하고 은메달은 ‘아쉽다’고 보도했던 언론도 메달지상주의 세태에 책임이 있다. 금메달을 따고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심석희조차 치욕의 세월을 보냈는데 비인기 종목 선수들은 오죽했겠는가. 지금도 어딘가에 심석희, 최숙현처럼 소리 죽여 울고 있는 선수들이 있을까 봐 두렵다.

미국 뉴욕타임스는 지난 10일 이 사건을 보도하면서 “선수들은 합숙하고 훈련하기 위해 학교 수업에 빠지기 때문에 운동 외에 선택할 수 있는 진로가 거의 없다. 이런 시스템은 감독에게 큰 권한을 부여하고 선수들은 경력이 단절될까봐 발언하는 것을 두려워하게 만든다”고 지적했다. 정부는 이런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심석희의 폭로가 나왔을 때 혁신안을 내놨지만 체육계는 ‘엘리트 체육 죽이기’라며 거세게 반발했다.

대한체육회는 지난 19일 ‘스포츠폭력 추방을 위한 특별 조치’를 발표했다. 피해자 보호, 가해자 엄중 징계, 합숙훈련 허가제 시행, 인권 교육 강화 등 듣기 좋은 말들이 나열돼 있다. 이 가운데 몇 가지나 실행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이미 지난해 1월 문화체육관광부가 발표한 혁신안의 내용과 비슷한 대목도 있다. 체육인들이 개혁에 저항하려면 이번에는 좀 더 그럴듯한 이유가 있어야 할 것이다. 정부와 체육회는 비도덕적 체육인들이 ‘엘리트 육성’이란 명분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며 활개 치는 환경을 방관해선 안 된다. 메달은 둘째다. 사람부터 살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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