된장찌개에 담긴 ‘유정과 무정’

고영 음식문화연구자

“노파의 만드는 장찌개는 그다지 맛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노파는 자기가 된장찌개를 제일 잘 만드는 줄로 자신하고 또 형식에게도 그렇게 자랑을 하였다. 형식은 그 된장찌개에서 흔히 구더기를 골랐다. 그러나 노파의 명예심과 정성을 깨뜨리기가 미안하여, ‘참 좋소’ 하였다. 그러나 ‘참 맛나오’ 하여 본 적은 없었다. 그러나 노파는 이 ‘참 좋소’로만 족하였었다.”

고영 음식문화연구자

고영 음식문화연구자

‘우리 근대소설의 문을 연 작품’, ‘당시 지식청년들의 자서전’ 등의 평을 받는 이광수(1892~1950)의 소설 <무정> 속 한 장면이다. ‘매일신보’ 연재를 시작한 해가 1917년, 책으로 펴낸 해가 1918년이다. 그때 한반도의 도시에서는 일식과 중식 요리점이 성업 중이었다. 프랑스 음식을 갖춘 호텔의 영업에도 물이 올랐다. 볼셰비키와 소련이 싫어 러시아를 떠난 이른바 백계 러시아 사람들은 경성에 정착해 러시아빵을 구웠다. 커피와 브랜디와 맥주와 샴페인은 도시 경관의 일부였다. 지구 곳곳에서 온 깡통과 병조림 음식, 양철 상자에 곱게 누운 형형색색의 과자가 얼마든지 한반도를 돌아다녔다.

그건 그거고, 서민 밥상의 주인공은 여전히 된장찌개다. <무정>의 주인공, 경성학교 영어 교사 이형식은 하숙집 주인 노파가 끼니마다 차린 “밥에 된장찌개 한 뚝배기”를 벗어날 수 없었다. 그래도 이형식은 그때까지 유정(有情)한 사람이었다. 친구가 “그 험구로 노파의 된장찌개가 극히 좋지 못함을 비웃”자 급히 입을 틀어막을 줄도 알았다. 하숙집도 집, 하숙집 주인도 내 식구로 치는 옛 시대감각의 연장이었을 테다. 한집안 사람에게, 끼니에 대한 평가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어느 집 밥맛이 더 좋고, 어느 밥상에는 무엇이 부족하다는 소리는 무례를 넘은 악덕일 뿐이다. 맛난 밥상과 맛없는 밥상이 존재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런 판단 자체가 진공인 시대와 시대감각이 있을 테다. 권태는 느닷없이 떠올랐다.

“장로가 책상 위에 놓인 초인종을 두어 번 울리니 건넌방으로서, ‘녜’ 하고 열너덧 살 된 예쁜 계집아이가 소반에 유리 대접과 은으로 만든 서양 숟가락을 놓아 내어다가 형식의 앞에 놓는다. 보기만 해도 시원한 복숭아화채에 한 줌이나 될 얼음을 띄웠다.”

미국 유학을 앞둔 딸자식을 위해, 이형식을 영어 개인교수로 초빙한 김 장로의 여름 손님 대접이 이러했다. 19세기 말 이래 한반도에서도 가동을 시작한 제빙이라는 희대의 산업기술은 여름 맥주에 여름 빙수라는 전에 없던 일상을 만들어냈다. 겨울을 기다려 얼음을 캐고 따지 않아도 되는 시대, 여름에도 냉면이 가능한 시대가 열렸다. 아울러 밥상 받은 쪽의 평가가 밥상 차린 쪽을 향하는 시대도 따라왔다. 작정하면 여름에 한없이 세련된 얼음 화채가 가능한 시대에, “나이 많으니깐 그렇구려” 하는 하숙집 노파의 밥상 변명이 더는 통할 리 없다. 이형식은 노파에게 입을 다물었다. ‘솜씨 이전에, 기본 위생은요?’ 하고 굳이 더 뱉을 것도 없었다. 그저 말없이 그 미각과 관능부터 무정(無情)해졌다. ‘참 좋소’와 ‘참 맛나오’ 사이의 얕은 갈등도 단박에 스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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