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정당방위가 될 때

정유진 국제에디터

‘흑인 생명도 소중하다.’ 미국의 한 시위 현장에서 2명을 총으로 사살하고 1명에게 중상을 입힌 18세 백인 소년 카일 리튼하우스가 지난달 19일 완전한 무죄를 선고받았다. ‘비무장 상태’의 사람들을 총으로 쏴 죽인 그에게 배심원단이 ‘정당방위(Self-Defense)’를 인정했기 때문이다.

정유진 국제에디터

정유진 국제에디터

정당방위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첫째, 내가 먼저 공격을 시작한 쪽이어선 안 된다. 둘째, 즉시 맞대응을 하지 않으면 당장 내가 큰 해를 입을 수 있는 급박한 위험 상황이어야 한다. 이때 그 상황은 주관적 판단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합리적’ 판단에 의해 누가 봐도 그렇게 여겨져야 한다.

그렇다면 AR-15 반자동 소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던 리튼하우스는 그날 시위 현장에서 도대체 어떤 위험 상황에 놓였기에 정당방위를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일까.

리튼하우스의 총에 가장 먼저 맞은 사람은 조지프 로젠바움이었다. 조울증으로 입원 치료를 받다가 막 퇴원한 로젠바움은 반자동 소총을 어깨에 두른 리튼하우스와 마주치자 어떤 이유에서인지 세면도구가 든 비닐봉지를 던지며 그에게 달려들었다. 겁에 질린 리튼하우스는 방아쇠를 당겼다. 네 발의 총탄을 맞은 로젠바움은 곧 사망했다.

그다음 죽은 사람은 앤서니 후버였다. 로젠바움이 쓰러지는 것을 목격한 주변의 시위 참가자들은 리튼하우스에게 “왜 총을 쐈나”라고 소리쳤다. 도망치는 리튼하우스를 뒤쫓아간 후버는 들고 있던 스케이트보드로 리튼하우스를 제압하려 했다. 리튼하우스는 또다시 방아쇠를 당겼다. 세면도구와 스케이트보드로 공격해온 비무장 시민들에게 대량 살상용 무기로 맞대응을 한 것이다.

그럼에도 배심원단은 ‘정당방위’를 인정했다. 결정적 이유는 바로 로젠바움과 후버가 그의 총에 손을 대려 했다는 점이었다. 리튼하우스는 법정에서 “그들이 내 총을 빼앗아간 후 그 총으로 나를 쏠 수 있다는 극도의 공포감을 느꼈다”고 증언하며 오열했다.

검사 측은 리튼하우스가 애초에 보란 듯이 반자동 소총을 메고 다니며 남들을 자극해 스스로 위험 상황을 만들어냈기 때문에 ‘정당방위’가 성립될 수 없다는 주장을 펼쳤지만, 배심원단은 리튼하우스의 손을 들어줬다. 격화된 시위 현장에서 흥분해 달려드는 사람들의 손에 AR-15 소총을 빼앗길지도 모른다고 여긴 순간 리튼하우스가 느꼈을 급박한 공포는 정당하다고 본 것이다.

하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총을 가진 사람이 총을 뺏길까봐 느끼는 공포가 정당방위의 이유가 된다면, 총이 없는 사람이 총을 가진 사람에게 느끼는 공포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미국의 온라인 매체 슬레이트는 ‘모든 것이 정당방위가 될 때’라는 기사에서 배심원단의 이 같은 판결은 총을 들고 있는 사람은 선한 의도로 무장을 한 것이지만 총을 뺏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위험세력이라는 생각을 전제로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런 전제하에서는 ‘리튼하우스가 상대방에게 총을 쏘지 않고 그 상황을 피할 수는 없었는가’라는 질문은 무의미하게 된다. 총을 든 사람이 져야 할 책임은 없고, 정당방위만 남게 된다.

펜실베이니아대학의 법철학 교수인 킴벌리 케슬러 페르잔은 <텍사스 법 리뷰>에서 “총으로 무장한 시민들이 (정당방위에 대한) 모든 기준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다”면서 이렇게 물었다. “무엇이 정당방위인가? 무엇이 ‘합리적인’ 판단인가? 질서를 수호하겠다며 총을 든 사람이 누군가를 죽였다면, 항상 정당방위로 인정해야 하나? 죽어서 말을 할 수 없는 희생자는 항상 먼저 공격을 시작한 쪽이 돼야 하나?”

결국 이런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방법은 하나뿐이다. 나도 무장을 하는 것이다. 나는 선한 의도로 총을 들어서 괜찮지만 남들의 손에 총이 들어가면 내 생명이 위협받을 수 있으므로, 내 총을 지키기 위해 방아쇠를 당길 수 있는 정당한 권한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총기는 공포를 낳고, 공포는 다시 총기를 낳고, 다시 공포가, 다시 총기가 서로를 지탱하는 근거가 되어 모두가 모두에 대한 정당방위만 남는 사회가 된다.

리튼하우스 사건은 총기 소유가 자유화된 나라에서나 벌어질 수 있는 지극히 미국적인 사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점점 각자도생이 극단화되고, 살아남는 자가 옳은 쪽이 되어가는 사회에서 이 사건은 정당방위에 쉽게 면죄부를 주는 사회가 역설적으로 모두에게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 깨닫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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