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릿 우먼 파이터의 투쟁

변재원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정책국장

투쟁이라는 단어 앞에서 늘 남성을 먼저 떠올렸다. 커다랗고 까슬까슬한 주먹을 쥔 채 하늘을 향해 치켜들고, 구릿빛 이마에는 해진 머리띠가 둘려있고, 다부진 체격을 다 덮지 못하는 낚시 조끼, 뒷면에는 요약된 요구안 또는 조직적 구호가 적혀 있는 사람이 선 모습. 오랫동안 왜인지 투쟁은 그런 모습이어야 익숙하다 느꼈다. 투쟁의 외형적 하자를 검토하는 사이, 누구에게나 삶은 곧 투쟁이라는 보편타당한 의미를 소거하고 말았다. 그저 건장한 남성이 투쟁의 주인이라 생각했다. 남성중심주의적 착각이었다.

변재원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정책국장

변재원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정책국장

지난 두 달간, 일할 때나 쉴 때나 여성의 투쟁을 곁에서 지켜봤다.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해 노력하는 성소수자부모모임을 그린 영화 <너에게 가는 길>에서도, 발달장애인의 탈시설과 24시간 지역사회 체계 수립을 위해 단식을 결의하는 여의도 국회의사당 맞은편 농성장에서도, 내가 본 투쟁의 최전선에 선 이들 다수는 여성이었다. 성소수자와 발달장애인 자녀가 한평생 겪는 차별, 배제, 멸시 앞에서 ‘당사자 아닌 당사자’로 나선 채 주먹을 쥐고, 열흘 상당 곡기를 끊어가며, 사회구조가 낳는 야만적 폭력에 맞서기로 결의한 여성이었다.

<너에게 가는 길>에서 트랜스젠더 한결의 어머니이자 성소수자 부모모임 회원인 나비는 ‘당사자 아닌 당사자’로서 투쟁하고 있었다. 평범한 소방공무원으로서 살아온 자신은 트랜스젠더도, 퀴어도 아니기에, 정확히 ‘트랜스’ ‘젠더’ ‘퀴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헷갈리면서도, 그의 자녀가 오랜 시간 괴로워한 성별 정정과 차별의 문제 앞에서 지지하기 위해 형태소와 같은 말들을 외우고 다녔다. 평일에는 소방 업무에 집중하고, 주말에는 성소수자 부모모임에 참석하며, 아직까지 낯선 표정과 입에 딱 붙지 않는 말로 제 자녀는 ‘젠더퀴어’이고, ‘폴리아모리’적 성향을 가지고 있고, ‘FTM 트랜스젠더’라며 소개하면서도, 그것이 정확히 무슨 뜻인지는 모른다며 쑥스러운 듯 말을 덧붙였다. 비록 자녀가 정확히 무엇을 지향하고, 원하는지는 다 알지 못하지만, 수년에 걸친 성별정정허가 사건을 위해서도, 격렬한 갈등이 있었던 인천퀴어문화축제에도, 숙명여대 트랜스젠더 입학생 포기로 자녀가 안절부절못할 때도, 공적 공간과 사적 공간을 초월하며 언제나 그는 자녀가 외롭지 않도록 곁을 지켰다.

열흘 상당의 단식 농성을 진행한 발달장애인의 어머니 역시 마찬가지다. ‘당사자 아닌 당사자’로서 발달장애인 자녀를 향한 사회적 차별과 잔인한 폭력 앞에서, 그저 자녀보다 하루만 더 살았으면 하는 꿈이 전부라고 외치는 여성이 주축 되어 국회의사당 맞은편에서 농성을 결의했다. 2021년 정기국회가 끝나기 전, 발달장애인 생활실태전수조사 및 주간활동서비스 지원 시간 확대를 이끌어내기 위한 단식 투쟁이었다. 단식 투쟁 중인 한 지부장은 결의 발언으로 “한 끼를 못 굶는다는 제가, 벌써 단식 8일 했는데도 잘 버티고 있습니다. 역시 엄마는 대단하구나 싶습니다. 우리 아이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다면 이 길을 가야 하겠지요. 부끄럽지 않은 엄마가 되고 싶습니다. 투쟁!” 외치며 자신을 바라보는 동료 어머니들을 향해 꾹 쥔 주먹을 치켜세웠다. 이 추위에도 차별에 저항하는 ‘스트릿 우먼 파이터’들은 존엄과 연대를 꿈꾸며 매서운 투쟁 앞에 뜨거운 삶을 기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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