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웬 ‘영어 지우기’

김세훈 스포츠부 부장

중국 정부가 2월4일 개막하는 베이징 동계올림픽을 앞두고 노골적으로 영어 축소 정책을 실행하고 있다. 베이징 지하철 노선도에 나온 영어로 적힌 역 이름 위에 중국어 로마자 발음기호 스티커를 덧붙이는 식이다. Station은 역을 의미하는 중국어 站의 발음기호 ‘zhan’으로 바뀌었다. Olympic Park는 ‘Aolinpike Gongyuan’으로 대체됐다. 아오린피커는 ‘올림픽’ 영어 발음과 비슷한 한자(澳林匹克)로 만든 조어다. Gongyuan은 공원(公園)의 중국어 발음 ‘공위안’이다. Terminal 2는 ‘2 Hao Hangzhanlou’로 바뀌었다. Hao는 번호를 뜻하는 호(號)자의 중국어 발음이다. Hangzhanlou는 ‘터미널’을 뜻하는 ‘航站樓’의 발음이다. 중국어 발음을 로마자로 표기한 것을 ‘핀인’이라고 한다. 1950년대에 개발됐고 지금도 중국 초등교육에서 쓰인다.

김세훈 스포츠부 부장

김세훈 스포츠부 부장

베이징 동계올림픽을 코앞에 두고 나온 영어 지우기 정책에 대한 반응은 회의적이다. 거의 모든 중국인은 핀인 없이도 중국어를 읽는다. 노령층은 핀인을 잘 모른다. 중국어를 모르는 외국인은 핀인을 읽을 수는 있지만 무슨 뜻인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외국인이 핀인을 발음할 경우, 중국인이 알아듣는다는 게 그나마 장점이다. Park, terminal을 모르는 중국인도 공위안, 항잔러우는 알아듣는다. 그런데 이것도 올림픽에 한해서는 실효성이 약하다. 외국 선수단은 서방의 ‘버블’과 같은 ‘폐쇄(氣泡·閉環)’ 시스템 속에 격리돼 일반 중국인과 거의 접촉하지 않기 때문이다.

시진핑 국가주석은 집권한 2013년부터 중국 문화에 대한 자부심을 강화하는 정책을 펴고 있다. 동시에 서방 서적과 영화 등에 대해서는 비판적이다. 지난해 국가교재위원회는 “시진핑 신시대 중국특색사회주의 사상을 교과과정 및 교재에 반영하라”는 지침을 발표했다. 교재위원회는 “사회주의를 발전시킬 건설자와 후계자를 육성하려면 시진핑 사상으로 학생 두뇌를 무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중국은 최근 사교육을 강력하게 단속해 사실상 금지했고 해외 교재도 쓰지 못하게 했다. 중국에서 가장 개방된 도시 상하이에서도 초등 영어시험이 폐지됐다.

14년 전, 중국은 영어 보급 정책을 대대적으로 시행했다. 2008 베이징 하계올림픽을 중국이 세계무대에 등장하는 신호탄으로 여겼다. 거리 표지판이 영어로 바뀌었고 잘못된 영어 표현도 수정됐다. 영어 교육도 강조됐다. 당시 중국 언론은 “대중적으로 올림픽 인지도를 높이고 베이징의 영어 수준과 문명화를 보여주는 대규모 운동”이라고 선전했다.

베이징은 이번 동계올림픽을 개최함으로써 세계 최초로 동·하계 올림픽을 모두 여는 도시가 된다. 세계 최고의 국제도시를 자부하는 베이징이 노골적인 영어 제거 정책을 펴는 건 아이러니하다. “중국인은 핀인을 읽을 필요가 없고 외국인은 이해하지 못하는 이상한 상황이 됐다”고 비판한 중국 관영 언론 광밍데일리는 아래와 같은 의견을 내놓았다.

“외부 세계에 오픈된 국가일수록 외국인에게 편의를 제공하는 게 의무다. 현대인은 돌이킬 수 없는 세계화 속에 살고 있고 상호 교류가 필수가 됐다. 우리도 외국인이 이해하기 쉽도록 시설과 표지판을 만드는 걸 고려해야 한다.” 어린이도 아는 글로벌 상식을 중국 정부만 모르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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