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혁기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송혁기의 책상물림]이름의 운명

자신의 이름을 바꾸고 싶어 하는 분들이 있다. 발음이 안 좋거나 촌스럽게 느껴져서, 혹은 사주성명학을 근거로 운명을 바꿔 보려고 이름을 바꾸는 경우도 있다. 여러 번거로움을 감수하면서까지 개명을 단행하는 분들에게는 그만큼 절실한 사정이 있을 것이다.

개명의 이유 중에 비교적 공감이 쉽게 가는 것은, 널리 알려진 흉악범과 이름이 같은 경우다. 조선시대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명(名)이 따로 있지만 평상시에는 늘 자(字)로 불리던 시절, 조재우라는 인물은 성년이 되면서 회지(會之)라는 자를 받았다. 그런데 주변에서 말들이 많았다. 송나라 때 간신으로 유명한 진회의 자가 회지였기 때문이다. 전도유망한 스물세 살의 젊은이로서 평생 간신의 이름으로 불리게 된 조재우는 집안 어른인 조귀명을 찾아 상의했다. 그런데 조귀명은 자를 바꾸지 말라고 단호하게 말하며 두 가지 이유를 들었다.

평생 진회를 연상하게 하는 이름으로 불리면서 진회처럼 되지 않겠다고 수시로 다짐하다 보면 그와 정반대의 훌륭한 사람이 될 것이라는 게 첫 번째 이유다. 요순처럼 되라고 권유하면 위축되어 잘 실천하지 못하지만 극악무도한 걸이나 도척을 언급하며 경계하면 오히려 분발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라는 근거를 들었다. 두 번째 이유가 더 인상적이다. 사람뿐 아니라 글자에도 행복과 불행이 있다. ‘회지’라는 두 글자가 진회를 만나 치욕스러운 불행을 겪어 왔는데 조재우가 새로운 회지로서 훌륭한 삶을 살아 역사에 기록된다면 회지 두 글자도 명예를 회복하고 행복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이름을 바꾸지 말라는 것이다.

이름의 운명은 그 이름을 지닌 사람의 운명일 뿐 아니라 그 이름에 사용된 글자의 운명이기도 하다. 글자와 이름에는 죄가 없다. 그 이름에 치욕을 주는 사람이 문제다. 이름이 사람의 운명을 좌우한다고 믿는 이들을 향해 300년 전의 조귀명은 말한다. 도리어 사람이 이름의 운명을 좌우하는 것이라고. 그러고는 걸과 도척의 악을 씻어낼 만한 사람에게 걸과 도척이라는 이름을 줌으로써 천하에 불행한 글자가 없게 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가만히 생각해 본다. 오늘 나의 이름은, 이 글자들은, 나를 만나서 과연 얼마나 행복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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