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자와 패자, 그리고 버려진 자

나원준 경북대 경제학 교수

최근 인플레이션의 두드러진 특징은 전 세계적인 현상이라는 점이다. 물가급등 탓에 서민들의 삶은 팍팍하기만 하지만 OECD 공식 통계 기준으로 한국은 다른 나라에 비하면 근원소비자물가가 코로나19 이전보다 덜 오른 축에 든다. 말 그대로 전 세계적인 생계비 위기인 셈이다. 이 ‘글로벌’ 인플레이션의 또 다른 특징은 수요보다는 공급 측면 원인이 결정적이라는 점이다. 코로나19 확산과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생산비용이 치솟으면서 이번 인플레이션이 점화되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다만 전쟁의 영향을 논할 때에는 서방의 경제제재와 그 배후에 작용하는 미국의 대외 전략도 종합적으로 고려될 필요가 있다. 미국의 중국 견제 역시 글로벌 공급망의 재편을 강제하며 비용인상 요인이 되기 때문이다.

나원준 경북대 경제학 교수

나원준 경북대 경제학 교수

만약 주요국 정부의 재정 확장과 같은 수요 측면 원인이 중요했다는 미국 공화당의 가설이 맞다면, 코로나19 이전에 비해 실업률이 최근에 더 많이 떨어진 나라일수록 물가상승률이 더 많이 올랐어야 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정반대 일이 벌어졌다. 미국의 민간 싱크탱크인 경제정책연구소(EPI)에 따르면 실업률이 더 많이 떨어진 나라에서 물가상승이 덜했으니 말이다. 공화당의 가설은 틀렸다. 한국에서는 그 가설이 더 틀렸다. 국제통화기금(IMF)의 세계경제전망에 따르면 한국은 미국과는 반대로 경제활동 수준이 추세를 밑돌아 GDP갭이 마이너스다. 그런 상황에서는 수요 진작이 물가를 자극하는 효과가 더욱 제한된다. 지난 2년여 진보진영에서는 보다 적극적인 재정 확장을 주장했는데 결과적으로 당시 주장이 옳았음이 확인된다.

그렇다면 이 인플레이션의 승자는 누구고 패자는 누굴까. 인플레이션은 사회계급 간 분배 갈등이 조정되고 난 결과적 현상이다. 따라서 임금과 이윤이 물가상승에 각자 얼마나 기여하고 있는지 따져보는 작업은 최근 인플레이션의 성격 파악에 도움이 된다. 우리로서는 경제부총리마저 임금인상이 물가를 자극할 것이라고 걱정하는 마당이니 더욱 그렇다. 그런데 해외 연구 결과를 살펴보면 부총리의 걱정은 근거가 미약하다. 미국의 경우 코로나19 기간 들어 임금인상(19%)보다 이윤 증가(38%)가 물가 상승에 두 배나 더 기여하고 있다는 네덜란드 경제학 교수 세르파스 스톰의 분석 결과가 그렇다. 호주의 최근 물가급등은 15% 정도가 임금 상승 때문이고 60% 정도는 이윤 증가 때문이라는 호주연구소의 분석이 또 다른 예다. 유럽의 인플레이션에 대한 유럽중앙은행 집행위원 이자벨 슈나벨의 설명도 마찬가지다. 문제는 오히려 이윤과 물가의 상승 악순환일 수 있다.

미국 루스벨트 연구소에 따르면 미국 기업들의 판매가와 원가의 차이에 상응하는 총마진은 최근 들어 사상 최고 수준까지 치솟았다. 시장지배적인 독과점 대기업들이 총마진을 늘린 폭이 가장 크다고도 한다. 독점자본이 인플레이션 환경과 시장 권력을 이용해 기회주의적으로 이윤을 극대화하면서 물가상승이 가속화된 측면이 있다는 지적이다. 한국이라고 다를까. 4대 금융지주사의 올해 2분기 순이익은 신기록을 경신했다. 4대 정유사의 2분기 합산 매출 총이익률은 15%를 넘어 코로나19 이전 5년 평균의 2.25배다. 반면 OECD 통계 기준으로 2021년 한국 노동자들의 평균 연간 실질임금은 2019년보다도 절대적으로 낮아졌다. 실질임금 하락은 경제성장률이나 노동생산성 상승률 추이와도 대조를 이룬다. 결국 이번 인플레이션의 승자는 독점자본이고 패자는 노동자다. 쌀값마저 폭락한 한국 농민은 아예 버려진 자다.

이와 관련해 최근 남미 경제학자들이 1990~2014년에 걸쳐 133개국 자료를 실증 분석한 결과 국민소득 가운데 노동소득이 차지하는 임금 몫이 늘어날수록 물가상승률이 낮아진다는 결론을 도출한 점은 의미가 크다. 임금상승을 경계하는 프로파간다는 실상을 은폐한다. 분배가 평등할수록 물가도 하향 안정되기 쉽다. 왜냐하면 그럴수록 기업가들의 혁신이 자극되어 생산성 향상 효과도 커지기 때문이다. 임금 정체가 생산성 둔화로 이어진다는 증거는 넘쳐난다. 경제가 위기를 벗어나는 과정에서 자본이 가져가는 이윤 몫이 줄지 않으면 회복도 그만큼 더디고 고통스러운 과정이 된다. 경제적 약자들에게 부담이 가중되는 탓이다. 그러니 횡재세나 초과이윤세가 지금 맥락 없이 언급되는 것이 아니다. 인플레이션에 맞서는 경제정책은 시장 권력에 대한 사회적 통제를 확립하고 분배를 보다 평등하게 하는 방향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승자와 패자, 그리고 버려진 자 각자가 마주한 오늘의 비정한 현실은 나아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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