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큰둥해지지 않기

오은 시인

“응.” 긴 질문을 던졌을 때 짧은 답변을 들으면 때때로 당혹스럽다. 기대했던 것이 가슴속에서 와르르 무너지는 느낌도 든다. “과일 좋아해요?” “네.” “어떤 과일을 특히 좋아해요?” “다 비슷해요.” 딸기와 수박과 단감과 귤이 순식간에 뭉뚱그려진다. 하나로 포괄된다기보다 개별성이 사라지는 순간이다. 시큰둥한 답변은 묻는 이의 적극성에 찬물을 끼얹는다. 철벽 방어 앞에서 대화의 맥은 끊길 수밖에 없다. 난데없이 바닥에 떨어진 과일만 맥락 밖으로 데굴데굴 굴러간다.

오은 시인

오은 시인

시큰둥한 사람이 매력적으로 보일 때도 있었다. 겉과는 달리 속은 따뜻할 것이라 믿었던 탓이다. ‘냉미남’이나 ‘차도녀’ 같은 신조어는 아마 이런 세태를 반영했을 것이다. 세련됨과 자신만만함을 갖춘 도시 사람은 왠지 비밀한 사연을 갖고 있는 듯 보이니 말이다. 그들의 쌀쌀맞은 태도는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포장되고, 영화나 드라마 속에서는 꽤 긴 시간을 할애해 거기에 대한 이유를 설명한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첫 만남이나 일회적인 만남에서 시큰둥함은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호기심을 자극할 수도 있겠으나 많은 이들이 이를 무례함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최근에 비비언 고닉이 쓴 <아무도 지켜보지 않지만 모두가 공연을 한다>(바다출판사, 2022)를 흥미롭게 읽었다. 1970년대 뉴욕과 2020년대 한국의 사정은 다르겠지만 소통은 그때나 지금이나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의 말마따나 “뉴욕은 마치 하나의 나라 같고 우리가 사는 동네는 도시 같아서” 아는 사람을 우연히 마주치면 반가움과 당황스러움이 동시에 고개를 든다. 차갑고 건조한 도시 분위기를 깨는 것은 역시나 따뜻한 말 한마디와 선의가 깃든 행동이다. 그는 걷고 웃고 말하고 싸우는 사람들 틈바구니 속에서 매일매일 공연을 보는 듯한 느낌에 사로잡힌다. 어두울수록 존재감을 발휘하는 빛 한 점을 찾아 헤맨다.

다음 대목을 읽다가 머릿속에 불이 켜졌다. “친구 관계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서로에게서 활기를 얻는 관계고, 다른 하나는 활기찬 상태여야 만날 수 있는 관계다. 첫 번째에 속하는 사람들은 함께 시간을 보내기 위해 방해물을 치운다. 두 번째에 속하는 사람들은 일정표에서 빈 곳이 있는지 찾는다.” 서로 활기를 얻는 관계에서는 시큰둥함이 존재할 리 없다. 함께 즐거워야 생기가 돌 테니 더 열심히 입과 귀를 열 것이다. 활기찬 상태여야 만날 수 있는 두 번째 관계는 삐거덕거리는 순간을 감수해야 한다. 약속한 일시에 활기찬 상태가 아닐 때, 대화는 피상적으로 흐르다 불협화음을 자아낼지도 모른다.

시큰둥함은 성정이라기보다는 태도에 가깝다. 타고난 것이 아니므로 개선할 수 있다는 말이다. ‘시큰둥하다’의 첫 번째 뜻은 “말이나 행동이 주제넘고 건방지다”인데, 이는 상대에게 여유로움이 아닌 명령이나 위협으로 다가올 수 있다. 이때의 시큰둥함은 행동(작용)이다. 행동하는 사람이 미연에 조절할 수 있다는 말이다. 한편 두 번째 뜻은 “달갑지 아니하거나 못마땅하여 시들하다”인데, 이때의 시큰둥함은 반응(반작용)에 가깝다. 그것은 말투나 목소리에 배어 있기도 하고 표정이나 기색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첫 번째 뜻의 시큰둥한 사람과 두 번째 뜻의 시큰둥한 사람이 만나면 상호 작용이 불가능할 것이다.

시큰둥한 사람은 별 자극을 받지 않는다. 여간해선 주변을 신경 쓰지도 않고 만남에서 대화거리를 찾아내려고도 하지 않는다. 자신의 의중을 상대가 알아서 파악해주기를 원할 뿐이다. 시큰둥한 태도가 지속되면 삶이 시큰둥해지는 것은 시간문제다. 좋은 일에도 기뻐하지 않고 슬픈 일에도 슬퍼하지 못하게 된다.

올가을의 목표 중 하나는 시큰둥함과 결별하는 것이다. 시큰둥함에 더 이상 시큰둥하게 반응하지 않겠다. 어떤 상황에서도 결코 먼저 시큰둥해지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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