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진 변호사·법무법인 바른

과거 당사자가 소송에서 헌법을 운위하기 시작하면 판사가 ‘어지간히 할 말이 없나 보다’라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우리 헌정사에서 헌법의 규범력이 망가지는 경우를 수없이 보아왔던 게 이유 중 하나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인식은 1988년 헌법재판소가 창설되어 의미 있는 결정을 속속 내리면서 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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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재의 주요 결정은 법률조항의 합헌 또는 위헌에 관한 판단이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 한정합헌결정 또는 한정위헌결정이다. 이것이 무엇이길래 대법원이 그리도 반대하는 것일까. 실례를 들어 설명하면 이렇다. 헌재는 1992년 최초의 한정위헌결정을 내렸다. 과거의 정기간행물의 등록에 관한 법률 제7조 제1항은 정기간행물을 등록하고자 하는 자는 대통령령이 정하는 ‘해당 시설’을 갖추어야 한다고 규정했는데, 그 시행령 제6조 제3호는 ‘해당 시설’을 자기 소유의 것으로 한정했다. 남의 시설로는 등록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헌재는 ‘해당 시설’을 시행령에 따라 자기 소유여야만 하는 것으로 해석하면 과잉금지원칙 등에 반하여 위헌이라고 판단했다. 법률조항만 보면 그 자체로 위헌이라고 할 수 없지만 그 적용 범위를 좁힌 시행령대로 해석하면 위헌이라는 선언이었다. 법률은 되도록 합헌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원칙에 따라, 법률조항을 전부 제거하는 대신 헌재의 해석으로 그 적용 범위를 정한다는 것, 이게 ‘한정’의 뜻이다.

이런 헌재의 판단에 무슨 잘못이 있을까 싶은데, 대법원의 입장은 다르다. ‘헌재가 어느 법률조항이 위헌이거나 합헌이라고 할 수는 있다. 하지만 한정위헌이나 한정합헌은 헌재가 법률조항의 적용 범위를 해석하는 것이고, 이는 합헌 또는 위헌 여부를 제외하고는 법령 해석의 권한을 법원에 귀속시킨 헌법 조항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요컨대 법원의 권한에 대한 침해라는 입장이다.

권리구제 위해서 사법기관 존재

지난 7월 헌재가 한정위헌결정에 따르지 않은 대법원 판결을 취소한 일이 있었다. GS칼텍스가 과세처분 취소소송을 냈다가 처분의 근거가 된 구 조세감면규제법의 어느 조항에 대해 위헌제청신청을 했고, 헌재가 한정위헌결정을 내렸는데도 이에 따르지 않은 대법원 판결에 소원심판이 청구되자 그 대법원 판결을 취소한 것이 사건의 간략한 전말이다. 헌법재판소법은 법원의 재판은 헌법소원심판 청구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규정하나, 헌재는 위헌결정의 기속력에 반하는 재판은 헌법상 재판청구권을 침해하므로 취소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 지난 6월 유사한 사건에서 헌재가 대법원 판결을 취소하자 대법원은 ‘법원 외부 기관이 헌법상 최고법원인 대법원이 내린 재판의 당부를 다시 심사할 수는 없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누구 말이 옳을까? 이를 가릴 만한 제3의 사법기관은 없다. 헌법재판소법에 한정위헌결정이나 한정합헌결정에 관해 명문 규정이 없는 것이 다툼의 한 가지 원인이다. 관련 법률조항을 고치지 않는 한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긴 어렵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질문을 바꿔 보자. 이제 GS칼텍스는 세금을 내야 하나, 아니면 내지 않아도 되나? 답답하기로는 세금을 매긴 과세관청도 마찬가지일 게다. 이달 13일자 법률신문은 이번 사건에서 GS 측이 다시 법원에 재심소장을 제출한 사실을 보도했다.

이 기막힌 사태의 발단은 대법원의 권한 주장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헌재의 위헌 선언은 국민의 기본권 보장을 위한 것이다. 한편 헌재의 결정은 소송 자체의 해결이라기보다는 법원 재판의 전제가 되는 법률조항의 위헌성에 대한 판단이고, 최종적인 권리구제는 대법원에 달려 있다. 따라서 대법원의 권한 주장은 국민의 권리구제를 방치하는 데 귀착한다. 이래서야 되겠는가. 사법기관 간 권한의 우위 가르기와 국민의 권리구제 중 어느 것이 중할까. 내가 보기에 한정합헌결정이나 한정위헌결정은 단순 위헌결정의 효력이 가져올 부작용을 염려해 헌재가 선택한 불가피한 조처다.

기억하라, ‘최종심은 국민’이다

같은 변형결정의 일종인데도 불구하고 헌법불합치결정에 대하여는 대법원이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헌재가 대법원에 대한 우위를 점하려거나 굳이 대법원의 법령 해석에 관한 권한을 침해하고자 변형결정을 내린 것은 아닐 것이다. 대법원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은 데에는 시기심이나 우월감 등의 감정적 요인이 있다고 본다면, 오해일까.

국가의 통치구조에서 사법기관이 존재하는 것은 그 사법기관의 권한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다. 국민의 재판청구권과 권리구제를 보장하기 위해서다. 이런 관점에 서지 않으면 해결책이 없다. 그리고 이렇게 본다면 헌재의 입장을 대법원이 이해하지 못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누군가 말했듯이 늘 ‘최종심은 국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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