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가 ‘조용히’ 마비되고 있다

이진우 포스텍 명예교수
[이진우의 거리두기] 자본주의가 ‘조용히’ 마비되고 있다

우리 문 앞에서 서성인다고 여겨졌던 무시무시한 손님이 어느새 조용히 들어와 우리 안방을 차지하고 있다. 이 손님의 정체를 모르면 유령이고, 정체는 알지만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르면 위험이다. 자본주의를 철저하게 해부하고 비판한 마르크스는 이 손님을 공산주의라는 유령으로 묘사한다. 공산주의에 기반한 중국마저 국가 자본주의를 도입한 마당에 누구도 공산주의라는 유령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정작 우리가 두려워하는 이 손님은 바로 ‘자본주의의 위기’다. 자본주의가 한계에 도달했다는 징후는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다. 21세기의 시대적 문제로 불리는 극단적인 ‘사회 불평등’과 ‘기후 변화’는 현재의 자본주의 시스템으로는 해결될 수 없다는 두려움이 만연하고 있다.

이진우 포스텍 명예교수

이진우 포스텍 명예교수

잘못된 것은 분명한데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를 모를 때 위기는 위험이 된다. 자본주의의 위기는 결코 ‘방 안의 코끼리’가 아니다. ‘방 안의 코끼리’란 누구나 알고 있으면서도 그 누구도 먼저 이야기를 꺼내지 못하는 커다란 문제를 비유하는 표현이지 않은가? 그런데 자본주의의 위기는 오늘날 누구나 입에 올리는 매우 보편적인 문제다. 자본주의 문제를 얘기하면 진보주의자로 여겨졌던 시절은 이미 오래전에 끝났다. 자유시장을 믿는 보수주의자도 자본주의가 교착 상태에 빠졌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자본주의에 대한 부정적 시각에 귀를 기울인다. 자본주의가 사회에 미치는 파괴적인 영향을 막고 끊임없는 성장을 추구한다. 그들이 여전히 보수적인 것은 자본주의의 지속적인 자기 쇄신을 신뢰하기 때문이다.

누구나 알고 있는 문제는 위험하지 않다. 자본주의의 한계에 대한 문제의식은 동시에 해결책을 모색하기 때문이다. 조용히 찾아오는 위기가 더 위험하다. ‘방 안의 코끼리’라는 표현은 러시아의 시인 이반 크릴로프의 한 우화에서 유래하는데, 이 우화는 박물관에 가서 온갖 작은 것들을 알아차리지만 코끼리는 알아차리지 못하는 한 호기심 많은 남자에 관한 이야기이다. 오늘날 우리는 이 우화를 거꾸로 읽어야 한다. 자본주의의 위기는 누구나 다 아는 코끼리의 형태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너무나 일상적이고 당연해서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사소한 현상의 형식으로 ‘서서히 그리고 조용히’ 퍼지는 것은 아닐까? 굳이 동물의 비유를 들자면, 벼룩시장이라는 용어가 암시하듯 자본주의 시장에 거래되는 상품에는 이 체제를 감염시킬 벼룩이 포함된 것은 아닐까?

‘조용한 퇴직’ 문제 훨씬 더 심각

이제 자본주의 체제를 안에서 무너뜨리는 벼룩을 자세히 관찰해보자. 요즈음 자본주의를 선도하는 선진국에서는 어디에서나 ‘조용한 퇴직’(Quiet quitting)이 급속도로 확산하고 있다. 조용한 퇴직은 실제로 직장을 그만두는 것이 아니라 직장에서 주어진 일만 하고 초과 근무는 거부하는 태도를 말한다. 겉으로는 수동적으로 일을 하지만 임금만큼만 일하겠다는 ‘조용한 퇴직’은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사보타주이다. 코로나19 팬데믹 기간인 2021년 2월에서 2022년 2월 사이에 5700만명의 미국인이 직장을 그만둔 ‘대퇴직’ 현상은 그동안 조용히 일어나던 ‘반노동’ 정서를 강화하였다.

사람들이 애써 일을 하지 않는다면, 자본주의 체제가 유지될 수 있을까? 노동과 그것이 창출하는 자본은 자본주의의 토대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필요한 만큼만 일하거나 전혀 일하지 않으려 한다. 많은 사람이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스스로 철수하고 있다. 설령 일을 그만두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내가 원하는 것보다 더 많이 해야 한다는 생각을 포기한다. 기성세대는 개인 생활보다 업무를 중시하고 열정적으로 일하는 것을 높이 평가하는 ‘허슬 문화’에 젖어 있었지만, MZ세대는 일이 곧 인생이라는 사고방식에 반기를 들고 조용한 퇴직을 선택한다.

이러한 정서가 오늘날 ‘반노동’(anti-work) 운동으로 표출되고 있다. 갑질, 직장 내 괴롭힘, 열악한 근로환경 등 부정적 노동조건을 고발하는 포럼으로 시작한 이 운동은 이제 자본주의의 뿌리인 노동을 겨냥한다. 젊은 미국인들은 ‘나는 노동을 꿈꾸지 않는다’고 선언한다.

독일의 경우 전국 2명 중 1명꼴로 아르바이트로 전환하고, 56%는 심지어 재정적으로 여유가 있으면 즉시 직장을 그만둘 것이라고 말한다. 재정적으로 독립하여 조기에 퇴직하겠다는 ‘파이어’족의 태도도 다르지 않다.

미국뿐만 아니라 유럽 젊은이들 사이에서도 반노동 추세는 확인된다. 그들은 덜 일하고, 덜 저축한다. 놀라운 것은 이러한 추세가 중국에서도 발견된다는 점이다. 2021년 4월에 시작한 중국의 사회적 저항 운동인 ‘탕핑(躺平)’을 직역하면 ‘드러눕기’인데, 이는 초과 노동의 사회적 압박에 대한 거부이다. 탕핑 운동은 이제 ‘바이란(摆烂)’을 동반한다고 한다. ‘썩어가게 놔두다’라는 뜻의 이 용어는 악화하는 상황을 되돌리려고 하기보다 담담히 받아들이는 태도를 표현한다. 이미 오래전에 일본에서는 ‘사토리’ 세대가 등장하였다. 여러 유흥거리는 물론 돈과 명예욕, 출세 등에도 관심을 아예 끊은 채로 득도한 것처럼 최소한의 욕망만을 가지고 살아가는 일본의 젊은 세대를 가리키는 이 낱말은 ‘깨닫다’라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자발적으로 철수하는 이 세대는 도대체 무엇을 깨달은 것일까? 왜 그들은 일하지 않으려는 것일까? ‘조용한 퇴직’을 단순히 MZ세대의 라이프스타일로 치부하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 여전히 삶의 심각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젊은 세대의 일시적인 허튼소리로 흘려버리는 것은 더욱 옳지 않다. ‘조용한 퇴직’이 함축하고 있는 문제는 훨씬 더 깊고 심각하다. 그것은 경제적 조건이 바뀌었다는 것을 말해줄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의 체제가 조용히 마비되고 있다는 증거이다.

자유경쟁의 불평등 없애는 게 답

미국 반노동 운동 포럼의 모토는 조용히 다가오는 자본주의 위기의 실체를 드러낸다. “부자만이 아닌 모두를 위한 실업.” 실업은 자본주의의 어쩔 수 없는 부작용으로 여겨지지만, 사실 실업을 생산하는 것은 자본주의의 성공이다. 우리는 이상한 시대에 살고 있다. 자본주의가 발전하여 생산성이 증대하면 일자리가 늘어나야 하지만, 현실에서는 거꾸로 일자리는 줄어들고 일자리가 있는 사람들의 업무 강도는 더욱 높아진다. 일하는 사람들은 번아웃에 시달릴 정도로 과로하고, 일없는 사람들은 점점 더 쓸모없는 사람이 되어 조용히 퇴출된다.

더욱 이상한 것은 자본주의의 혜택을 가장 많이 받는 부자들은 ‘일하지 않는’ 실업 상태이고, 나머지 다수는 ‘일이 없는’ 실업 상태라는 점이다. 젊은 세대들은 이런 상황에서 과연 형편없는 일자리에 계속 매여 살아야 하는지 묻기 시작한 것이다. 조부모는 차고에 자동차 세 대를 가지고, 부모는 적어도 집 한 채를 가졌는데, 평생 아무리 노력해도 자기 집은커녕 변변한 차 한 대 살 여유조차 없다면 왜 일해야 하고 과로해야 하는가? 자본주의 시스템이 나를 위해 해주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면, 젊은이들이 이 시스템을 외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제까지 자본주의 체제에 자발적으로 참여하게 만든 동기가 조용히 그리고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 자본주의의 핵심은 능력주의이다. 능력이 있고 노력만 하면 그에 따른 보상을 받을 수 있다는 자본주의의 약속이 거짓으로 드러나고 있다. 우리는 현존 사회주의 체제가 붕괴할 때 평등이라는 사회주의 이상을 조롱하지 않았는가? 경쟁이 없는 독점 구조, 주로 출생에 기반한 재산 분배, 성장과 발전을 포기한 긴축 체제, 쇠퇴하는 경제적 역동성이 사회주의의 특징으로 묘사되었다. 우리는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모든 것을 평등하게 취급하는 강제된 평등이 사회를 마비시킨다는 것을 경험했다. 그런데 자유경쟁을 통해 고착화된 불평등도 사회를 마비시킨다.

자본주의가 능력주의의 약속을 지킬 수 없다면, 누가 자발적으로 이 체제에 참여하겠는가? ‘조용한 퇴직’은 자본주의 체제가 조용히 마비되고 있다는 증거이다. 이제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농담은 그만두자. 오늘날 사회의 상위 1%는 한국 전체 자산의 25.4%를 소유하고 있고, 독일에서는 35% 그리고 미국에서는 이미 40%에 이르렀다. 이러한 불평등을 우습게 여기는 분위기에서 일과 삶을 진지하게 생각하라는 조언은 냉소적이고 폭력적이다. 자본주의를 마비시키는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조용한 퇴직’은 우리 사회를 근본적으로 뒤흔들어 놓을지도 모른다. 위기는 이렇게 조용히 다가오는데, 우리 사회는 미친 정쟁으로 시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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