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훈 위원장, ‘런종섭’ 사태는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김민아 경향신문 칼럼니스트
21일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귀국한 이종섭 주 호주 대사가 기자들의 질문세례에도 입을 굳게 다물고 있다.  조태형 기자

21일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귀국한 이종섭 주 호주 대사가 기자들의 질문세례에도 입을 굳게 다물고 있다. 조태형 기자

‘런종섭’이 유턴했다. ‘해병대 채모 상병 순직 사건’ 수사에 외압을 행사한 혐의를 받아온 이종섭 주 호주 대사(전 국방부 장관)가 21일 귀국했다. 호주 부임을 위해 출국한 지 11일 만이다.

이 대사는 “임시 귀국한 것은 방산 협력 관련 주요국 공관장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서”라고 밝혔다. “체류기간 동안 공수처(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와 일정이 잘 조율돼 조사받을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고도 했다. 하지만 수사 외압 의혹에 대해선 “수차례에 걸쳐 의혹들이 사실이 아니란 점을 말씀드렸다”며 재차 부인했다. 사의 표명 의사를 묻자 답을 피했다.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전날(20일) 이 대사 귀국을 언급하며 “다 해결됐다”고 말했다. ‘이 대사 즉각 귀국’을 요구했더니, 윤석열 대통령이 받아들였다는 자찬이다. 그런데 무엇이 해결됐나?

이 대사는 본인 말대로 ‘방산협력 공관장 회의’ 참석을 위해 일시 귀국했다. 6개국 대사가 참석한다는 이 회의가 ‘급조’됐다는 논란은 일단 제쳐두자. 문제의 핵심은 이 대사가 귀국만 하면 시민들이 이해해줄 거라 보는 여권 인식에 있다. 시민이 ‘런종섭’에 분노한 까닭은 중대 사건의 핵심 피의자로 ‘특명전권대사’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국 땅에서 그와 함께 숨쉬고 싶어서 화를 낸 게 아니다.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21일 대구에서 열린 윤재옥 원내대표 선거사무소 개소식에서 축사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21일 대구에서 열린 윤재옥 원내대표 선거사무소 개소식에서 축사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한 위원장은 지난 1월 김건희 여사의 ‘디올 백’ 문제로 윤석열 대통령과 충돌했다. ‘국민 눈높이론’을 외치던 한 위원장은 당장 김 여사 사과라도 이끌어낼 기세였다. 하지만 1주일도 안 돼 충남 서천시장 화재 현장에서 윤 대통령에게 고개를 숙였다.

한 위원장은 이후 “제가 김 여사의 사과를 이야기한 적 있었나요”라며 기자들의 귀를 탓했다. 결국 윤 대통령이 KBS 대담에서 “아쉬운 점이 있다”며 어물쩍 넘어가는 걸로 사태는 봉합됐다. 디올 백 사태의 핵심인 청탁금지법(김영란법) 위반 의혹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김 여사의 모습도 공개석상에서 사라졌다.

이번에도 비슷한 양상이 벌어질 수 있다. 언론이 이 대사에 대한 추가 조치를 물으면 “제가 이 대사 거취를 이야기한 적 있었나요”라고 되물을지 모른다. 디올 백 사태에서 청탁금지법 위반 의혹을 성공적으로 소거했듯, 이번에도 이 대사를 귀국시킴으로써 수사 외압 의혹을 소거할 수 있으리라 기대할 것이다. 하지만 시민을 우습게 보지 마라. 한번 속지 두번 속지 않는다.

이 대사가 인천공항으로 입국한 시간, 박정훈 대령(전 해병대 수사단장)은 군사법원에 출석했다. 박 대령은 채 상병 순직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려다 항명 혐의로 기소됐다. 누가 실정법을 위반했는지는 결국 법원이 판단할 일이다. 그러나 은폐·축소 의혹을 받는 전직 장관은 대사가 돼 공관장 회의에 참석하고, 은폐·축소 의혹을 제기한 장교는 법정에서 자신을 방어해야 하는 상황은 누가 봐도 정의롭지 않다.

‘해병대 채모 상병 순직 사건’ 수사와 관련해 항명 혐의로 기소된 박정훈 전 해병대 수사단장(대령)이 21일 서울 용산구 중앙지역군사법원에 출석하고 있다. 한수빈 기자

‘해병대 채모 상병 순직 사건’ 수사와 관련해 항명 혐의로 기소된 박정훈 전 해병대 수사단장(대령)이 21일 서울 용산구 중앙지역군사법원에 출석하고 있다. 한수빈 기자

한국은 국민개병제(징병제)를 시행하는 국가다. 젊은 사병의 안타까운 죽음을 밝히는 일은 국기(國基) 차원의 문제다. 수사에 외압이 작용했는지, ‘윤 대통령의 격노’가 있었는지, 실제 있었다면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낱낱이 파헤쳐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피의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대사라는 겉옷부터 벗겨야 한다.

한 위원장이 “다 해결됐다”고 생색을 내려면 할 일이 있다. 이 대사 해임이나 사퇴를 촉구하고 이끌어내는 게 우선이다. 하지만 그럴 생각이 없는 듯하다. 그는 21일 “이제 답은 공수처와 민주당이 해야 할 일이지, 정부와 국민의힘이 해야 할 건 아니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외교 결례를 무릅쓰고 대사를 귀국하게 했다”면서 “아직 (이 대사를 조사할) 준비가 안 됐다면, 이건 공수처와 민주당이 총선을 앞두고 정치질하는 것”이라고도 했다.

논리가 성글고 어설프다. 애시당초 피의자를 대사로 임명하지 않았다면 외교 결례를 저지를 일도 없었다. 수사기법상 이 대사 같은 핵심·고위급 피의자는 다른 관련자 조사 후 소환하는 게 상식이다. 한 위원장이 법무부 장관일 때, 송영길 전 민주당 대표가 ‘전당대회 돈봉투 의혹’과 관련해 검찰에 ‘셀프 출석’을 시도한 적이 있다. 당시 한 장관 발언이다. “수사는 일정에 따라 진행되고 있다. 마음이 다급하시더라도 절차에 따라 수사에 잘 응하면 될 것 같다.”

정치는 말로 하지만, 말로만 이뤄지지는 않는다. 실천이 뒤따라야 하고, 위험도 감수해야 한다. 한 위원장은 윤 대통령과 ‘차별화’는 하고 싶지만, 한 발 더 나아갈 배짱은 없는 것 같다.

용기가 없으면 “다 해결됐다”는 공치사는 하지 말라. 조용히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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