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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서사 아카이브

<완경일기>(민음사)는 완경 이후의 삶을 누리는 포유류는 고래와 인간 뿐이라고 소개한다. 죽기 전까지 가급적 많은 자손을 퍼트리는 것이 생물체의 목적일텐데, 완경 이후의 삶은 이같은 진화의 전제를 위반한다.

몇 가지 가설이 있다. ‘수명 연장설’은 생물이 생식 가능한 시기를 넘길 정도로 오래 살게 됐다고 말한다. 예전에는 완경기를 넘길 만큼 장수하는 경우가 적었다는 것이다. ‘생식 갈등설’은 어머니가 성숙한 딸들과 경쟁하지 않기 위해 재생산 능력을 포기했다고 본다.

저자 다시 스타인키는 ‘할머니 가설’을 지지한다. 여성들이 중년에 이르러 생식을 중단하는 이유는 자손을 여유롭게 부양하고 지역 사회를 향한 전반적인 조언에 참여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위의 두 가설은 남성, 할머니 가설은 여성 학자가 제안했다.

<완경일기>의 저자는 완경은 문제가 아니라, 완경을 폐경이라 낙인찍는 가부장제 사회가 문제라고 말한다.

<완경일기>의 저자는 완경은 문제가 아니라, 완경을 폐경이라 낙인찍는 가부장제 사회가 문제라고 말한다.

저자는 1962년 미국 뉴욕주 출생이다. 여러 편의 소설을 썼고, 미디어에도 기고한다. 컬럼비아대 등 몇 군데에서 문학을 가르치기도 한다.

원제는 ‘Flash Count Diary’, 즉 열감 횟수 기록 일지라는 뜻이다. 저자는 완경기를 맞아 강렬한 열감이 하루에도 수차례 전신을 훑는 기분을 묘사한다. 새벽 2시11분의 침대 위에서, 버스를 타고 가다가, 강의를 하다가 열감이 뻗는다. 사도 바울이 “육체에 주신 가시”라고 말한 느낌이며, “모든 것들이 다 뻣뻣하게 정지되어 있지만, 그 모든 것들이 다 잘못되었다는 불쾌한 감각”이라고 묘사된다. 저자는 한탄한다. “도망칠 수 있다면 얼른 달아나고 싶지만, 자신의 육체에서 도대체 어떻게 달아날 수 있단 말인가?”

모든 여성들이 겪는 일이지만, 이 사회에서 완경기에 대한 묘사는 이상하리만치 찾기 어렵다. 소녀가 성인 여성으로 성장하는 과정은 수많은 소설과 영화의 소재다. 성경험과 출산 역시 인생의 큰 관문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완경기와 이후의 삶에 대해서는 별 반응이 없다. 혹시 생식력이 없고 나이든 여성에 대해선 관심이 필요 없다는 건가.

미개한 시대, 완경기의 증상은 곧 마녀의 증표로 통했다. 턱에 털이 있으면 마녀, 주름이 졌으니 마녀, 쉽게 얼굴이 붉어지고 땀을 흘리니 마녀, 여름밤에 잠을 이루지 못해 잠옷 바람으로 돌아다니니 마녀, 쉽게 화를 내니 마녀. 젊음과 미를 숭상하는 현대 의학은 호르몬 요법으로 이같은 증상을 치료할 수 있다고 말한다. 저자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유럽 완경 학회에 참석했다가 남성 의사들의 발표, 의료기기 회사들의 마케팅을 보고 분노를 느낀다. 청년기와 같은 성생활을 하지 못하는 부부가 있다면, 그 책임은 완경기의 여성에게 돌아간다. 그러니 중년의 남편을 만족시키기 위한 레이저 질 성형 시술이 권장되는 것이다. 어떤 의사들은 이런 여성을 ‘환자’ 취급한다. 그런데 이런 시술은 여성 자신이 아니라 남성을 즐겁게 하기 위한 것 아닌가. ‘남편이 즐거우니 결과적으로 아내도 즐겁다’는 사고방식은 버릴 시기가 한참 지났다. 저자는 말한다.

“진화의 결정에 의해 생식 기간이 끝났고, 따라서 내 몸은 변화하고 있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이 사실 자체가 제대로 인식되지 않고 있다. 그 대신 의료계는 내 몸을 결함이 있는 존재로, 고쳐야 할 대상으로 바라본다.”

완경은 몸에 이끌렸던 삶에서 진정한 자유로 나아가는 과정이었다[플랫]

나이든 아내에게 매력이 사라졌다고 한탄하는 남편들은 자신의 몸부터 정직하게 바라봐야 할 것 같다. 아울러 세상은 남성기의 만족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아야한다. 1985년 뤼스 이리가레는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질은 남성의 성기에 제공되는 ‘숙소’로서의 가치를 지닌 것으로만 재단된다. 이러한 용어들로 이해해 보건대, 여성의 생식기는 그저 어떤 내용을 담기 위해 존재하는 봉투, 텅 비어 있는 구멍을 넘어서지 못한다.”

이런 세상을 깨달은 여성이 화를 내는 것도 당연하다. 화낼 만한 일에 화를 낼 뿐이다. 저자 역시 “완경기 이전의 삶 대부분을 분노보다는 슬픔 속에서 보냈다”고 돌이킨다. 분노는 호르몬 감소 때문이 아니라 그동안 정신을 둘러싸고 있던 장막이 걷혔기 때문에 나타난다고 주장한다.

<완경일기>는 페미니즘 서적이지만, 노화에 대한 서적이기도 하다. 노년은 젊음의 부재가 아니며, 노년만의 아름다움이 있다고 말하는 책이다. 젊음의 성을 되돌리기 위해 비아그라를 먹을 것이 아니라, 삽입 없이도 정답고 부드럽게 성을 향유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제안하는 책이다.

가을에 단풍이 든다고, 저녁에 해가 진다고 투덜대며 되돌리려는 사람은 없다. 여성이나 남성이나 늙는다. 노화를 받아들이고 그에 맞는 삶의 방식을 찾는 사람의 정신은 젊다. “융은 중년기에 이르면 우리가 반드시 시체를 찾아 묻어야 한다고 쓴다. 여기서 ‘시체’란 우리가 과거에 지니고 있었으나 이젠 한층 성장해서 더는 자신과 동일시할 수 없게 된 옛 정체성을 말한다.” 시체가 섞이면 정신의 토양은 한층 비옥해진다.

열감의 시기를 이겨낸 저자는 한층 자유로워졌다. “지금보다 더 젊었을 때, 나는 주로 생물학적 특성에 이끌려 다녔다. 이제는 자유로운 정신이 나를 이끌어 가도록 내버려 둔다.” 늙지 않는 양 자신을 속이는 일은 더이상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백승찬 기자 myungworry@kh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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