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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서사 아카이브

우울증은 어떻게 병이 되었나

기타나카 준코 지음·제소희 외 옮김 | 사월의책 | 392쪽 | 2만5000원

“일본 사람들은 왜 우울증에 걸릴 만큼 일을 하는가? 과로사라니, 죽을 때까지 일을 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이 책은 기타나카 준코 교수가 1990년대 말 북미 친구들에게 받은 한 질문으로부터 시작했다. 정신의학과 우울증을 둘러싼 논의는 국가와 지역, 사회마다 다르게 나타난다. 각 사회의 상황이 우울증과 자살 증가에 영향을 미친다. 기타나카 교수로부터 일본의 과로 우울증과 자살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미국인들은 못 믿겠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실제 과로사의 영어 번역어 ‘Karoshi’는 일본어 발음 그대로 사용한다. 당시 북미와 유럽인들에게 ‘일하다 죽는 것’은 낯선 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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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이오 대학에서 인문사회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의료인류학자 기타나카는 우울증을 둘러싼 일본의 언어와 담론들을 25년간 연구해 이를 바탕으로 책을 펴냈다. 그는 “우울증은 본질적으로 서양인의 경험으로 논의되곤 했다”면서 “우울증은 그 나라의 정치적 상황을 직접적으로 반영하는 것이며 또 그것은 역동적으로 역사적으로 변화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서구선 낯선 ‘과로사’, 1991년 대기업 직원 사망 후
일본내 피로, 우울 등 정신과 진료 ‘대중화’

일본에서 자살과 우울증이 국가적 관심사로 떠오르게 만든 사건이 있다. 1991년 8월, 일본의 대형 광고회사 덴쓰(電通)에서 일하던 오시마 이치로(당시 24세)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사망하기 1년 반 전 이 회사에 입사한 그는 내내 과도한 노동에 시달렸다. 밤 늦게 혹은 다음날 아침까지 일하는 일이 잦았고, 집에 돌아가지 못하는 날도 점점 많아졌다. 주변에 “나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다”고 말하고 다니던 그는 곧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부모는 오시마가 장시간 노동이 초래한 우울증 때문에 자살했다고 주장했다. 2000년, 일본 최고재판소는 “기업은 업무에 따른 피로나 심리적 부담이 과도하게 축적돼 노동자의 심신 건강이 손상당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의무가 있다”며 덴쓰가 오시마네 가족에게 1억6860만엔을 배상하도록 했다. 이 사건을 잘 알지 못하더라도 일본에서 8년 전 일어난 비슷한 사건을 기억하는 이가 많을 것이다. 도쿄대 출신의 신입사원 다카하스 마쓰리가 과로로 인한 스트레스와 고통을 호소하다 세상을 등졌다. “자고 싶다는 것 외의 감정을 잃어버렸다” “매일 다음날이 올까봐 두렵다”는 등의 말을 남긴 그가 다니던 회사도 덴쓰다.

일본 직장인의 우울증, 피해자는 남성의 언어로만 설명된다[플랫]

이후 일본 정신과 의사들은 업무 스트레스로 인한 피로를 우울증과 연관시키며 우울증에 대한 이해와 정신과 진료를 대중화했다. 우울증은 단순히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병리적 원인에 의한 것이라는 맥락을 설명한 것이다. 의사들은 “오늘날 대거 우울증과 자살로 내몰리고 있는 많은 사람들은 바로 일본 기업에서 가장 선호되는, 즉 이기심 없이 집단이익을 위해 자신을 헌신하는 부류”라는 생각을 알렸다. 곧 일본 사회에서 우울증은 경제적 불확실성의 시대, 수많은 국민들이 겪는 집단적 고통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이는 서양에서 정신의학 의료화 초기, 우울증을 뇌의 이상현상으로 정의하며 환자들을 ‘비정상인’으로 낙인찍고 감금한 양상과 달랐다. 우울증의 부상이 노동자의 고통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불러왔다.

남성 직장인만 ‘피해자화’…여성 배제 ‘젠더화’도
연간 수백명 ‘과로죽음’ 한국에 큰 시사

우울증이 ‘국민병’으로 떠오른 이후, 우울증 피해자들은 주로 남성 직장인의 형상으로 그려졌다. 이는 서양에서 주부가 우울증 피해자로 그려지는 것과 반대된다. 저자는 “여성의 낮은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으로 의존적인 상황이 그들의 우울증에 적절한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게 만든다는 점을 정신의학자들이 시사해왔다”며 “일본에서 보이는 특수한 우울증의 젠더화로 인해 남성과 여성이 다른 방식으로 고통받는다는 점이 민족지적 현지조사를 통해 드러났다”고 말한다. 우울증에 걸린 남성들의 서사는 완벽했지만 여성들은 아직 언어를 갖지 못했다. 의사들도 대부분 남성이었다. 저자가 만난 몇몇 정신과 의사들은 여성들의 증상이 “명확한 형태를 갖지 않고” “이질적인 형태”를 띤다고 말했다. 어떤 환자들은 많은 의사들이 자신의 증상을 진단할 수 없는 것이라며 ‘진짜가 아니’라고 무시하듯 다뤄왔다고 토로했다. 여성들의 고통을 표현하는 용어가 결핍돼 이들의 고통은 사적인 문제로 취급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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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3부로 구성됐다. 첫 장에서는 일본 ‘역사 속의 우울증’을 다룬다. 울병, 기울병 등으로 불렸던 전근대 시대 우울증 개념을 검토한다. 두 번째 장은 ‘임상 실천 속의 우울증’으로, 저자가 면담한 의사·환자들의 이야기를 통해 실제 행위 속 우울증을 탐구한다. 마지막 장은 ‘사회 속의 우울증’이다. 국내에서는 단신으로 다뤄졌던 오시마 사건의 변호사들이 어떻게 자살의 사회적 원인을 규명했는지를 좇아간다.

일본의 이야기를 다루었으나 한국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보건복지부의 ‘2022 자살예방백서’가 인용한 경찰청 변사자통계에 따르면 2020년 ‘직장 또는 업무상의 문제’로 자살한 사람은 492명에 이른다. 그러나 같은 해 업무상 자살이라고 산업재해를 신청한 건수는 87건에 불과했으며 이 중 산재가 승인된 것은 61건이었다.

초반부는 정신의학에 초점을 두고 의료화 과정의 역사를 심층 분석한 만큼 실무적이고 전문적인 이야기가 많다. 후반부는 사회, 법적인 이야기를 담아 더 대중적이다. 한국에서의 과로죽음을 다룬 사회학자 김영선의 <존버씨의 죽음>, 과로사 유족들의 이야기를 담은 <그리고 우리가 남았다> 등과 함께 읽을 만하다.

▼ 오경민 기자 5km@kh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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