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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서사 아카이브

“처음에 노브라 사진을 올리고 말들이 많았다. 이때 무서워하고 숨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던 이유는, 편견이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외모 평가에 대한 인식이 바뀌어야 한다. 칭찬도 어쨌든 평가 아니냐.” (JTBC2 <악플의 밤>) “2019년 4월 11일 낙태죄는 폐지된다. 영광스러운 날! 모든 여성에게 선택권을.”(인스타그램)

지난해 10월14일 설리가 세상을 떠났다는 비보가 전해진 직후부터 그가 남긴 치열한 분투의 기록들이 재조명되기 시작했다. “여성이라면 그에게 고마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용기를 기억하자”는 여성들의 목소리가 온·오프라인을 가리지 않고 터져나왔다. ‘악플의 희생양이 된, 요절한 20대 여자 연예인’으로 설리의 삶을 축소할 수 없다는 거대한 애도의 물결이다.

설리는 여자, 그리고 연예인에게 유독 가혹한 사회적 편견과 지독하게 맞서 싸운 예외적이고 독보적인 ‘여자 연예인’이었다. ‘여자 연예인답게’ 욕망의 대상으로 순순히 박제되길 바라는 대중의 기대를 끊임없이 배신하고, 자신만의 다양한 모습과 소신을 지속적으로 밝힌 용기있는 여성이었다. 바로 그 이유로 ‘악플 세례’와 ‘논란의 중심’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사회적 폭력의 피해자이기도 했다. 가장 폭력적인 곳에서, 가장 전투적으로 싸웠던 25세의 여성 설리. 많은 이들이 그에게서 ‘투쟁가’의 얼굴을 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2019년 6월29일 서울 삼성동에서 설리의 첫 싱글 발매를 기념해 열린  ‘Sulli’s Special Stage “Peaches Go!blin”’ 무대. SM엔터테인먼트 제공

2019년 6월29일 서울 삼성동에서 설리의 첫 싱글 발매를 기념해 열린 ‘Sulli’s Special Stage “Peaches Go!blin”’ 무대. SM엔터테인먼트 제공

하지만 설리의 이 투쟁에는, 줄곧 ‘기행’이라는 딱지가 붙었다. 그룹 f(x)의 멤버로 활동하던 시절에도 그는 항상 주목받던 ‘여자 아이돌’이긴 했지만 그의 이름이 대중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게 된 것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적극적인 소통에 나서면서부터였다. 2016년 그가 편안한 차림으로 찍은 ‘셀카’를 SNS에 게시한 이후부터, 그는 대부분의 남성들은 태어나 단 한 번도 착용해 본 적이 없는 브래지어를 입지 않았다는 이유로 수년간 지독한 악플과 악의적 기사에 시달려야 했다.

배우 이성민을 두고 “성민씨”라고 호칭한 설리의 SNS 게시물을 두고 ‘예의가 없다’ 비판하는 여론이 쏟아지기도 했다. 설리보다 경력과 나이가 많은 이성민을 ‘선배님’이라 부르지 않았다는 이유에서다. 이밖에도 그를 둘러싼 ‘논란’은 수도 없이 반복됐다. 그가 집에서 파티를 하고 친구와 술을 마시는 모습이 SNS에 공개될 때마다 “설리 이대로 괜찮은가”하는 무용한 제언이 쏟아져나왔다.

그럼에도 설리는 맞섰다. 수년간 ‘노브라 셀카’를 지속적으로 올렸다. 분명 무서웠을 것이고, 숨고 싶었을 테지만 그러지 않았다. 직접 밝혔듯이 “편견이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후 ‘노브라’를 하나의 운동이자, 가능성으로 받아들이는 사회적 흐름이 등장한 것은 그가 용기내 올린 수 많은 ‘셀카’들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성민씨’ 호칭 논란이 일었을 때도 그는 목소리를 냈다. 그는 “우린 모두 서로를 아끼는 동료이자 친구다. 내가 알아서 한다”며, 한국의 보수적인 서열 문화에 태연하게 경종을 울렸다.

‘기행의 장’처럼 여겨졌던 그의 SNS는 약자와 약자가 연대하는 하나의 장으로 변모해가기 시작했다. 그는 세계 여성의 날,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을 SNS를 통해 기꺼이 기념했고 ‘Girls Supporting Girls(여자는 여자가 돕는다)’라는 문구가 박힌 티셔츠를 입은 사진을 게시했다. ‘기행’으로 불리던 그의 시도들은, 누군가에겐 오늘을 살아갈 ‘연대의 힘’이 됐다.

“뭔가 잘못됐다고 느끼니. 나는 여기 있는데.” 지난 7월 발표한 첫 솔로곡 ‘고블린’에서 설리는 이렇게 노래했다. 얼마든지 멈출 수 있는 싸움이었다. ‘기행’이라는 오명과, 각종 성희롱성 악플 속에서도 그가 고통스러운 싸움을 이어간 이유는 바로 ‘여기 있는 나’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저 자기 자신으로 살고 싶었기 때문에, 더 많은 이들이 그렇게 살길 바랐기 때문에.

“설리가 행복하길 바랐다. 설리가 행복한 세상이라면 우리도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한 누리꾼은 SNS에 이런 글을 올렸다. 그의 싸움에 위안과 용기를 얻었던 이들이 적지 않았던 만큼, 지금 이곳엔 상실이 크다.

*이 글은 2019년 10월15일 경향신문에서
[기자메모]로 작성됐던 기사를 재가공했습니다.



김지혜 기자 kimg@kh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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