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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서사 아카이브

“안 된다는 말, 난 하나도 안 무섭다. 내한테는 된다는 거보다 안 된다는 게 훨씬 많거든.” 태어난 지 100일을 갓 넘긴 아기를 업고 ‘레디-고!’를 외친다. 영화 세트장은 메가폰을 잡은 감독의 집 마당. 제작비를 아끼기 위해 밥 때가 되면 배우, 스태프들의 식사도 직접 차려낸다. 한국 최초의 여성 영화감독 박남옥(1923~2017)의 이야기다.

지난 17일 서울 국립극장 무대에 오른 <명색이 아프레걸>은 여성에겐 유독 ‘안 된다’는 것이 많았던 시대, 사회적 통념에 맞서며 영화의 길로 걸어간 박남옥의 삶을 다룬다. 국립극장 3개 전속단체가 10년 만에 호흡을 맞춘 이 대형 기획공연에서 주인공 박남옥은 소리꾼 이소연(37)이 맡았다. 지난 10일 무대 리허설을 앞두고 국립극장에서 만난 이소연은 “코로나19로 모두가 힘든 시기 어렵게 공연을 올리게 됐는데, 역경 속에서도 자신의 꿈을 향해 걸어가는 박남옥의 삶에 더 깊이 공감하게 된다”고 말했다.

국립창극단의 간판 스타인 소리꾼 이소연은 지난 17일 막을 올린 국립극장의 기획공연 <명색이 아프레걸>에서 한국 최초의 여성 영화감독인 주인공 박남옥 역을 맡았다. 국립극장 제공

국립창극단의 간판 스타인 소리꾼 이소연은 지난 17일 막을 올린 국립극장의 기획공연 <명색이 아프레걸>에서 한국 최초의 여성 영화감독인 주인공 박남옥 역을 맡았다. 국립극장 제공

<명색이 아프레걸>은 당초 지난해 연말 무대에 오를 예정이었지만 코로나19 확산세로 지난 1월로 공연이 미뤄졌다. 그나마 1월에 시작했던 공연도 단 5회차 공연에 그쳐 아쉬움을 남겼다. 11개월 만에 더 커진 스케일로 관객과 다시 만나게 됐다. 국립창극단, 국립무용단, 국립국악관현악단 등 국립극장 3개 전속단체 단원들이 참여하며, 초연의 두 배에 가까운 75명이 무대에 오른다. 공연장도 512석 중극장인 달오름극장에서 1221석 규모의 해오름극장으로 커졌다. 이소연은 “3개 전속단체가 오랜만에 함께하는 공연이다 보니 협업이 굉장히 중요한데, 극 속에 녹아드는 세 단체의 교집합과 접점이 초연 때보다 더 커졌다”며 “극중 박남옥의 분신으로 무용수가 등장하는 것도 초연과 달라진 부분”이라고 귀띔했다.

이소연은 현재 국립창극단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는 간판 스타 중 한 명이다. 판소리 적벽가 이수자인 그는 창극 <변강쇠 점찍고 옹녀>의 옹녀, <춘향>의 춘향, <서편제>의 송화, <오르페오전>의 애울, <트로이의 여인들>의 카산드라, <배비장전>의 애랑 등 전통부터 창작까지 여러 작품의 주연을 맡으며 존재감을 뚜렷하게 새겨 왔다. 이번 공연은 그에게 익숙한 판소리와 창극이 아닌 노래와 연기가 한데 어우러진 음악극이다. 오페라계에서 주로 활동해온 작곡가 나실인이 곡을 썼다. 이소연은 “국악의 선율과는 다른 현대적 느낌의 음악인데, 좀 더 국악적으로 창극단답게 소화하려고 했다”면서 “소리꾼이 다른 장르의 곡을 불렀을 때 전통과 현대의 중간 지점에서 나오는 신선한 느낌도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판소리에선 흔치 않은 대구 사투리로 연기해야 하는 것도 도전이었다고 한다. “처음 대본이 나왔을 때 박남옥 이름 옆에 ‘대구 사투리’라고 쓰여 있어서 어렵겠다 싶었는데, 대구 출신 친구의 도움을 받으며 열심히 연습했다”며 웃었다.

프랑스어의 ‘전쟁 이후(apres)’와 영어의 ‘소녀(girl)’를 조합한 ‘아프레걸’은 한국전쟁 후 등장한 새로운 주체적 여성상을 일컫는 당대 신조어다. 그러나 공연은 통념과 역경을 뚫고 일어선 여성의 성공 스토리만을 그리진 않는다. 오히려 꿈을 향해 고군분투하는 과정에 겹겹이 쌓인 그의 고민와 갈등의 시간들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국립극장 제공

프랑스어의 ‘전쟁 이후(apres)’와 영어의 ‘소녀(girl)’를 조합한 ‘아프레걸’은 한국전쟁 후 등장한 새로운 주체적 여성상을 일컫는 당대 신조어다. 그러나 공연은 통념과 역경을 뚫고 일어선 여성의 성공 스토리만을 그리진 않는다. 오히려 꿈을 향해 고군분투하는 과정에 겹겹이 쌓인 그의 고민와 갈등의 시간들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국립극장 제공

프랑스어의 ‘전쟁 이후(apres)’와 영어의 ‘소녀(girl)’를 조합한 ‘아프레걸’은 한국전쟁 후 등장한 새로운 주체적 여성상을 일컫는 당대 신조어다. 아이를 낳고 사흘 만에 영화관을 찾은 박남옥의 노래로 시작되는 공연은 영화 <미망인>의 제작 과정과 영화 속 장면들, 박남옥의 삶의 여러 단편들이 교차하며 전개된다. 그렇다고 여성의 사회 활동이 쉽지 않았던 시기, 통념과 역경을 뚫고 일어선 여성의 성공 스토리만을 그리진 않는다. 오히려 꿈을 향해 고군분투하는 과정에 겹겹이 쌓인 그의 고민와 갈등의 시간들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이소연은 “박남옥은 지금 시점에서 봐도 여러모로 공감이 가는 인물”이라고 말했다. “자신의 꿈을 향해 가면서도 그 길이 맞는지 회의하고 고민하면서, 그 꿈의 무게를 느끼기도 하죠. 여러 힘든 상황 속에서도 긍정적인 에너지로 이겨나가려고 하는 사람이고요. 그가 그 시절 고민했던 것들이 지금도 깊이 이해된다는 건 여전히 (세상이) 완전히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란 생각도 듭니다.”

박남옥은 태어난 지 100일을 갓 넘긴 아기를 업고 ‘레디-고!’를 외친다. 영화 세트장은 메가폰을 잡은 감독의 집 마당. 제작비를 아끼기 위해 밥 때가 되면 배우, 스태프들의 식사도 직접 차려낸다. 국립극장 제공

박남옥은 태어난 지 100일을 갓 넘긴 아기를 업고 ‘레디-고!’를 외친다. 영화 세트장은 메가폰을 잡은 감독의 집 마당. 제작비를 아끼기 위해 밥 때가 되면 배우, 스태프들의 식사도 직접 차려낸다. 국립극장 제공

전후 여성의 삶을 여성의 시각에서 다룬 영화 <미망인>은 흥행에 참패해 개봉한 지 사흘 만에 막을 내렸고, 이 영화는 박남옥의 처음이자 마지막 영화가 됐다. 박남옥은 가정에 소홀했다는 이유로 남편에게 이혼을 통보받는다. 이소연은 “투포환 선수였던 박남옥이 ‘아무리 무거운 것이라도 멀리 던질 수 있다’고 말하는 대사가 극 속에 몇번 나오는데, 영화감독이란 꿈을 놓게 됐을 때 다시 이 말을 하는 장면이 뜨겁게 다가온다”고 말했다. “단순히 투포환 얘기가 아니라 커다란 날개였던 꿈, 동시에 쇳덩이처럼 무겁기도 했던 꿈을 멀리 보내겠다고 자기 자신에게 하는 얘기 같아서, 그 장면을 연습할 때마다 눈물이 많이 나요. 눈물이 나서 노래를 못 부를 때도 있는데, 차라리 공연 전 지금 많이 울어놔야겠다는 생각도 듭니다.(웃음)”

필름 후반부가 소실돼 추측으로만 남았던 영화 <미망인>의 결말 부분은 고연옥 작가가 상상력을 담아 새로 완성했다. 이소연은 “박남옥이라는 영화감독의 삶을 다루고 있지만 각자가 지닌 꿈과 갈망에 대한 이야기란 점에서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작품이 아닐까 생각한다”며 “연말에 마음이 뜨거워지는 공연이 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공연은 31일까지.


선명수 기자 sms@kh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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