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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서사 아카이브

천우희(35)는 또래 여배우들 중 인상적이면서도 안정적인 경력을 이어가는 중이다. 봉준호의 <마더>(2009), 나홍진의 <곡성>(2016) 등 한국을 대표하는 영화감독들과 작업했고, <써니>(2011), <해어화>(2016) 같은 상업영화에서도 개성을 발휘했다. <한공주>(2014) 같은 우울한 독립영화를 이끄는가 하면, <멜로가 체질>(2019)처럼 재치 있는 멜로물에서도 주연이었다.

20일 개봉하는 <앵커>(감독 정지연)에서도 천우희는 확연한 극의 중심이다. 베테랑 이혜영, 신하균이 곁에 있긴 하지만, 주인공의 불안한 심리를 설득력 있게 보여주고 몇 차례 반전을 무리 없이 소화해내는 건 오직 천우희의 능력에 달렸다. 천우희를 최근 화상으로 만났다.

영화 <앵커> 에서 세라(천우희)는 아나운서 출신의 방송사 간판 앵커다. |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제공

영화 <앵커> 에서 세라(천우희)는 아나운서 출신의 방송사 간판 앵커다. |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제공

이 영화에서 천우희는 방송사 간판 앵커 세라다. 앵커 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개편 때마다 불안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엄마 소정(이혜영)은 밀려나지 않으려면 정신 바짝 차리라고 늘 압박한다. 어느날 방송 직전 세라를 찾는 제보 전화가 걸려온다. 누군가 자신과 딸을 스토킹하고 있으며, 자신이 죽을지도 모르니 세라가 이를 직접 보도해달라는 것이다. 세라는 장난전화라 생각하고 끊지만, 방송 이후 찝찝한 마음에 현장을 찾아가니 실제로 엄마와 아이가 죽어 있다. 세라는 이를 보도해 명성을 얻지만 사건현장에 나타난, 숨진 엄마의 정신과 주치의 인호(신하균)가 마음에 걸려 사건을 놓지 못한다.

영화 속 앵커 연기를 한 많은 배우들이 발성이 힘들었다고 호소하지만 천우희는 발성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고 했다. 다만 “틀에 맞춘 전달자 역할을 하면서 내면을 표현하는 건 어려웠다”고 말했다. 영화용 카메라 앞에 뉴스방송용 카메라가 있었다. 뉴스 카메라 앞에선 지적이고 냉철한 전문직 여성이지만, 뉴스 카메라와 영화 카메라 사이에선 최고의 자리에서 밀려날까봐 불안에 휩싸인 인간이어야 했다. 공포영화적인 장면도 있어, 이에 맞게 극적인 표정연기도 필요했다.

영화 <앵커>는 스릴러 장르지만 공포영화 요소도 갖고 있다. |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제공

영화 <앵커>는 스릴러 장르지만 공포영화 요소도 갖고 있다. |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제공

실제 천우희는 세라와 달리 “다른 배우의 작품이 부러울 때가 있지만, 그걸 이루기 위해 경쟁하는 건 싫어한다”고 말했다. “기싸움도 싫어해요. 의미 없다고 생각합니다. 경쟁을 한다면 누구하고 해야 하나요. 한국 배우인가요, 제 또래 배우인가요. 연기는 공동작업입니다. 다만 나 자신과의 경쟁에 치열할 뿐이죠. 이전 작품보다 더 발전하고 싶습니다.”

천우희는 <앵커>에서의 연기를 꽤 명확하고 전략적으로 설명했다. 그는 “캐릭터가 대중에게 충분히 납득되려면 어느 정도 연민과 호감을 끌어낼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아무리 이상하고 심지어 악한 캐릭터라 하더라도, 관객은 그에 일정 수준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천우희는 “강한 캐릭터도 최대한 섬세하게 연기하려는 편이지만, 이번에는 직선적으로 연기했다”고 말했다. 감정의 기승전결을 명확히 설정했고, 감정을 그래프화해 그 연결을 매끄럽게 하려 노력했다.

<앵커>의 핵심에는 뒤틀린 모녀 관계가 있다. 특히 소정은 종래 한국영화에서 좀처럼 볼 수 없었던 어머니상이다. 쉽게 ‘애증’이라 표현하지만, 딸에 대한 ‘애’보다는 ‘증’의 비중이 조금 높은 듯한 인물이다.

영화 <앵커>는 뒤틀린 모녀 관계가 중심 소재다. 세라의 엄마 소정은 종래 한국영화에서 좀처럼 볼 수 없었던 어머니상이다. 쉽게 ‘애증’이라 표현하지만, 딸에 대한 ‘애’보다는 ‘증’의 비중이 조금 높은 듯한 인물이다. |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제공

영화 <앵커>는 뒤틀린 모녀 관계가 중심 소재다. 세라의 엄마 소정은 종래 한국영화에서 좀처럼 볼 수 없었던 어머니상이다. 쉽게 ‘애증’이라 표현하지만, 딸에 대한 ‘애’보다는 ‘증’의 비중이 조금 높은 듯한 인물이다. |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제공

“흔히 인식하는 엄마는 모성애가 넘치잖아요. 그건 단면적인 모습일 수도, 우리가 보고 싶어하는 모습일 수도 있어요. 엄마가 딸을 위해 항상 헌신하고 이해하고 배려할 수는 없잖아요. 엄마도 처음부터 엄마로 태어난 게 아닌데, 우리는 그가 언제나 엄마이길 바랍니다. 엄마도 엄마로서의 삶, 여자로서의 삶, 인간으로의 삶이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 보이는 모습이 극적이긴 하지만, 표현하는 감정은 보편적입니다.”

<앵커>는 여성 신인 감독의 데뷔작이다. 천우희, 이혜영 등 주요 배역도 여성이다. 한국영화에 여성서사가 늘어나긴 했지만, 아직 수가 적고 영화 규모도 크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천우희는 “여성서사에 대한 의무감을 갖고 있지만, 여성서사가 드물 수밖에 없는 현실적인 문제도 알고 있다”며 “젠더 이슈로 보고 여성서사 비중을 무조건 늘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야기가 다양해지는 동시에 개발, 투자, 제작 같은 현실적인 문제도 나아져야 한다”며 “저로서는 좋은 선택지를 택하고, 여성서사 작품에서 연기를 완성도 있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좋은 사례를 만들어 다음을 기약할 수 있다”고 말했다.


백승찬 기자 myungworry@kh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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