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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서사 아카이브

기후위기는 보통 전문가들의 입을 통해 다뤄진다. 이들의 말은 대체로 비슷하다. ‘이대로라면 산업화 이전 시기 대비 지구평균기온은 1.5도 이상 상승할 가능성이 높다. 기후위기는 가속화되고 있다.’ 대응책도 이미 나와 있다. 화석연료 사용을 줄이고, 재생에너지 중심의 에너지 구조를 짜야 한다. 내연기관차 대신 전기차를 타야 한다. 생활 전반에서 탄소 배출을 줄이는 사회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위기를 증명하는 과학적 근거는 차고 넘치며, 대응책 역시 있다. 그런데, 이것으로 충분할까.


기후위기는 지금보다 더 다양한 방식으로 이야기되어야 한다. 기후위기 대응은 개개인이 일상의 불편과 변화를 감수해야만 달성 가능하다. ‘평범한 보통 사람들’이 기후위기에 대해 어떻게 느끼는지, 일상 속에서 어떤 실천을 하거나 하지 못하는지, 어떨 때 죄책감이나 희망을 갖게 되는지에 대한 이야기들은 과학자들의 경고만큼이나 중요하다. ‘모든 기후 상황이 나빠지고 있다’는 반복적인 경고 속에서 사람들이 고민과 경험을 나누는 것은 그 자체로 ‘포기하지 않는’ 힘이 되기 때문이다.


경향신문은 다양한 분야에서 기후위기에 대해 고민하고, 무엇이라도 해보기 위해 노력하는 시민들을 만났다. 어떤 직장인은 바다를 찾을 때마다 쌓여있는 쓰레기에 환멸을 느끼면서도 바다 청소를 하고 있었다. 생애 처음으로 본인이 일주일간 쓴 플라스틱 갯수를 세어본 뒤 충격을 받고 친구들과 함께 학교에서 쓰이는 플라스틱에 대한 조사를 한 10대 청소년도 있다. 어떤 잡지사 에디터들은 기후위기라는 까다로운 주제를 독자에게 쉽게 전하기 위해 끊임없이 공부하고 있었다. 때론 흔들리고 좌절하면서도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애쓰는 이들의 인터뷰를 연재한다.


(6) 젠더의 관점에서 기후위기를 바라보는 연구원 정은아



‘(더울 때 밖에서 더위 피하는 건) 다 남자야. 여자들은 너무 더워도 집에 있지.’

정은아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연구원이 지난해 쓴 ‘가중되는 기후위기, 이주여성농업노동자, 쪽방촌 여성’ 보고서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쪽방촌 여성들이 더워도 밖에 나오지 못하는 건 성폭력 등 다른 위험에 노출될 가능성을 우려해서다. 그는 기후위기로 점점 극심해지는 폭염과 한파와 같은 현상들이 쪽방촌 같은 열악한 주거환경에 사는 여성, 농촌에서 일하는 이주여성노동자들의 일상을 어떻게 더 힘들게 만드는지를 살펴봤다. 정 연구원은 ‘젠더의 관점’에서 기후위기를 바라보는 연구자다.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정은아 연구원. 김영민 기자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정은아 연구원. 김영민 기자

기후위기는 부자와 가난한 자, 여성과 남성, 노인과 아이를 가리지 않고 맞닥뜨리는 문제다. 기후위기 자체는 차별적이지 않다. 그는 왜 기후위기 상황에서 젠더 문제에 집중한 것일까. “자주 들었던 말이에요. ‘무슨 관계가 있는지 모르겠다’는 말이요. 기후위기는 자연현상일 뿐 아니라 사회 안에서 일어나는 정치, 경제적 현상이기도 해요. 차별은 기후위기가 아니라 사회가 하는거죠. 사회에 불평등이 존재하는 한 기후위기의 영향은 차별적으로 나타나요.” ‘내가 모든 걸 바꿀 수 있다’는 마음보다는 ‘더 최악만은 막자’라는 마음으로 일을 하고 있는 그를 이달 초 서울 마포구의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사무실에서 만났다. 다음은 정 연구원과의 일문일답.

-어떤 일을 하시나요.

“정의로운 전환을 위한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에서 2020년 4월부터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어요. 그전에는 한국여성단체연합 사무처에서 평화·통일 활동을 주로 했어요. 환경 문제에 관심이 있는 편이었는데 여성단체에서 일을 하면서 기후, 난민, 개발 이슈를 접하고 관심사가 확장됐어요. 문득 ‘기후위기가 심각해지면 기존에 있던 성차별 문제와 맞물려서 서로 악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그런데 왜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을까, 그럼 내가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최근에 어떤 연구를 했나요.

“현재는 여성환경연대와 함께 기후위기와 여성에 관한 연구를 진행 중이에요. 지난해 했던 연구 중에는 기후위기로 인한 재난 상황에서 여성들이 겪는 문제를 연구했어요. 폭염과 한파, 코로나19 상황에서 이주 여성 노동자와 쪽방촌에 거주하는 여성이 겪는 일들을 인터뷰하는 사례 중심 연구였어요.”

-기후위기 자체는 남성과 여성을 구분하지 않는데, ‘여성’의 문제에 집중하는 이유가 있을까요.

“자주 들었던 말이에요. ‘무슨 관계가 있는지 모르겠다’는 말이요. 기후위기는 자연 현상일 뿐 아니라 사회 안에서 일어나는 정치, 경제적인 현상이기도 해요. 차별은 기후위기가 아니라 사회가 하는거죠. 사회에 불평등이 존재하는 한 기후위기의 영향은 차별적으로 나타나요. 유엔여성차별철폐위원회에서 2018년에 낸 기후위기와 관련한 권고에도 그런 내용이 나옵니다. ‘여성들이 겪고 있는 사회, 정치, 경제적인 불평등으로 인해 기후위기의 영향은 차별적으로 나타난다’. 경제적으로 여성 빈곤율은 남성보다 높아요. 같은 재난 상황에서 대응할 수 있는 자원이 상대적으로 적죠. 정치적으로도 재난 혹은 기후 관련 정책을 입안, 실행하는 과정에서도 여성들의 목소리가 반영되는 경우는 드물어요. 2015년에 여성정책연구원에서 재난 관련 설문조사를 했을 때도 많은 여성들이 대피를 해야 하는 재난 상황에서 내가 돌봐야 하는 대상과 함께 이동해야 한다고 답했어요. 돌봄 노동의 책임은 대부분 여성에게 지워져 있으니까요. ‘불평등’ 차원에서 보면 성별이 아니라 인종이나 소득에 따라서 나눌 수도 있겠죠.”

📌[플랫]남성이 인간의 ‘디폴트’로 설계된 세계에서 여성은 가난하고 아프다

-같은 상황에서도 다른 피해를 겪는 거군요.

“기후위기는 상대적이에요. 남성보다는 여성에게, 비장애인보다는 장애인에게, 사람보다는 동물에게 영향을 끼치죠. 사회적으로 취약한 위치에 있는 존재들이 더 많은 영향을 받습니다. 교차적 차별도 있을 수 있어요. 남성이지만 밖에서 일을 많이 하는 야외노동자라면 상대적으로 더 폭염이나 장마의 영향을 받을 수 있죠. 내 몸을 지나가는 수많은 ‘차별의 선’들이 있는데, 그게 기후위기와 만나면 기존에 있던 차별을 더 증폭시키는 거예요. 기후 정책을 짤 때도 정책결정자의 가치관, 우선순위, 문화가 녹아들어갑니다. 인종차별적 사회에서는 흑인의 건강피해가 폐기물 처리장 입지 선정에 중요하지 않고, 성차별적 사회에서는 여성의 돌봄과 노동, 건강 문제는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죠. 그래서 기후위기는 순수한 과학을 넘어선 사회적 문제입니다. 사회적 문제이기 때문에 사람이 해결할 수 있고 해결해야 해요.”

2020년 촬영된 서울 영등포구 쪽방촌의 모습. 이준헌 기자

2020년 촬영된 서울 영등포구 쪽방촌의 모습. 이준헌 기자

-쪽방촌에 거주하는 여성은 어떤 어려움을 더 겪나요.

“쪽방촌에는 폭염 때 열대야가 심하면 밖에서 주무시는 분들이 많아요. 여성분들께도 그렇게 하느냐고 물었더니 ‘무슨 일을 겪으려고 밖에 나가느냐’고 해요. 그 분들은 집 안에서 그냥 계속 참고 버티는거죠. 밤에 여성이 밖에서 혼자 잠을 잘 때 겪을 수 있는 문제들이 예상되니까. 쪽방촌에 살기 때문에 겪는 공통의 문제가 있고, 거기에 더해 여성이기 때문에 겪는 문제가 있는 거예요. 이주여성노동자도 기숙사에 살면서 식사나 청소, 빨래를 다 떠맡는 경우가 많고 성폭력 문제도 겪어요. 작년에 석탄화력발전소랑 내연자동차 부품사에서 일하는 여성 노동자들을 만났어요. 기혼이고 유자녀인데 발전소나 회사 정규직이 아닌 경우에는 다른 지역으로 전환 배치가 되더라도 그냥 그 지역에 머무르는 것을 택하겠다고 말해요. 남편보다 돈을 잘 벌지도 않는데, 가족을 두고 어떻게 떠나느냐는 거죠. 그런데 발전소 남성 노동자들은 대부분 ‘힘들지만 떠나겠다’고 해요. 구조를 바꾸지 않고는 기후위기 대응을 아무리 잘 한들 한계가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과학적 해결책 뿐 아니라 사회를 덜 차별적이게 만드는 것도 기후위기 대응책이에요. 돌봄 중심 사회로의 전환, 차별금지법 같은 것들도 사실은 기후위기를 야기한 현재 체제에서 다른 체제로 넘어가는데 중요한 문제거든요.”

-이런 문제에 왜 관심을 가져야 할까요.

“아직까지 깊이 고민하지 않아도 됐던 분들은 운이 좋았던 거라고 생각해요. 아직은 별 문제가 아닌 것 같을 때 해결하려고 노력해야 해요. 인천이나 부산이 물에 잠기고 나서 고민할 수는 없잖아요. 결국에는 내 일이 돼요. 자유로운 사람은 없어요. 우리는 지구를 벗어나 살 수 없고 그게 해결책도 아니니까. ‘나 그때가면 그냥 죽을래’ 하는 분도 있더라고요. 그런데 기후위기는 운석 충돌처럼 5초 안에 아픔을 느낄 새도 없이 소멸하는 게 아니거든요. 천천히, 오랜 기간에 걸쳐서 나타나요. 지금은 ‘이상기후’라고 불리는 가뭄, 고온, 허리케인이 일상적인 날씨가 되는 거예요. 매일이 재난이 되는거죠. ‘나의 삶’을 위해서라도 조금 더 관심을 가지면 좋겠어요.”

-기후, 젠더를 연구하는 연구자이자 시민으로서 어떤 고민이 있나요.

“가장 큰 고민은 ‘이게 다 무슨 소용이야’ 라는 생각을 어떻게 달랠지예요. ‘이미 다 망했어’라는 생각에 잡아먹히지 않으려고 노력하는데 쉽진 않아요. 올해 들어서는 ‘다 멸종되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을 거의 매일 했어요. 열심히 활동하고 있는데 저렇게 전쟁이 일어나고, 석유값은 치솟고, 식량난이 생기고, 사람들은 막 죽잖아요. 그런데 제가 사는 곳은 아무 일도 없고 사람들도 괜찮아 보일 때면 모든 게 가상현실 같고 소름끼칠 때가 있어요. 지금은 ‘내가 모든 걸 다 바꿀 수 있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이것보다 더 나빠지게 만들 수는 없어’라는 마음으로 활동해요. 더 최악을 막기 위해서. 동료들이 없으면 못할 것 같아요.”

-비슷한 고민을 하는 분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나요.

“동료를 많이 만드는게 중요한 것 같아요. 혼자 고민할수록 외롭고 힘들거든요. 나랑 비슷하게 생각하는 사람의 숫자를 늘려가는게 내 고민을 해결하는 좋은 방법이기도 해요.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사람을 많이 만나세요. 그런 연결 작업을 저도 해 보겠습니다. 혼자가 아니고, 당신만이 품고 있는 고민이 아니라는 것을 이야기할 수 있는 자리요. 일상생활에서 ‘용기내 챌린지’(다회용기에 음식이나 식재료를 포장하는 것)를 하거나, 비건(채식) 지향을 하는게 작고 아무 것도 아닌 일처럼 느껴질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런 것 하나하나가 지속가능하고 생태적인 사회로 나아갈 수 있는 좋은 운동 방법이에요. 의미가 있다는 것에 의문을 갖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김한솔 기자 hansol@kh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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