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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서사 아카이브

2018년 10월 원의림 변호사(법률사무소 의림)가 혼인신고를 할 때 범유경 변호사(법무법인 덕수)와 로스쿨 친구들은 헌법재판소 결정문을 참고해 ‘혼인 축하선언문’을 작성해 선물했다. 이 선언문 ‘판결요지’에는 “현행 민법 상의 부계성본 원칙을 타파하기 위해 사회운동, 헌법소원, 입법청원 등의 수단으로 가족관계등록법과 민법 등 관계법령 개정에 앞장서라”는 내용을 담았고 다같이 법대 건물 앞에서 낭독했다.

그로부터 4년여 후 원의림 변호사는 2023년 태어난 아들에게 자신의 성을 물려줬다. “부성주의와 가부장제에 대한 저항의 의미로 자신의 성을 물려준” 원 변호사가 ‘엄마 성 빛내기’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원 변호사는 “김준영 작가와 플랫팀이 이 프로젝트를 한다는 소식에 반가웠고 ‘내가 한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위로를 받는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플랫입주자프로젝트]엄마가 말했다 “엄마부터 엄마 성으로 바꿔볼게”

신청자가 100명을 넘어서자 한 번 더 위로를 받았다. 원 변호사는 “공감하는 사람들은 많아도 선뜻 나서는 사람은 적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제 생각보다 여성들은 훨씬 용감하다는 느꼈다”며 “신청자들에게 받은 위로를 사회 변화로 승화시키는데 일조하고 싶어 프로젝트에 참여했다”고 말했다.

지난해 12월 시작한 ‘엄마 성 빛내기’ 프로젝트에서 성본 변경 청구서 작성 자문을 맡은 원의림(왼쪽부터), 범유경, 최나빈, 김윤진 변호사가 6일 서울 동작구 서울여성프라자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를 마치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문재원 기자

지난해 12월 시작한 ‘엄마 성 빛내기’ 프로젝트에서 성본 변경 청구서 작성 자문을 맡은 원의림(왼쪽부터), 범유경, 최나빈, 김윤진 변호사가 6일 서울 동작구 서울여성프라자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를 마치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문재원 기자

“기하급수적으로 커진 연대와 협력의 힘”

프로젝트 신청 마감 후 최종 신청자가 137명에 이르자 원 변호사는 평소 이 문제에 관심을 가져온 다른 변호사들에게 법률자문단 합류를 요청했다. 5명의 변호사들이 화답하면서 자문단은 범유경·김형태 변호사(법무법인 덕수), 김윤진·최나빈 변호사(재단법인 동천), 이상은 변호사(이상은 법률사무소)로 총 6명이 됐다. 원 변호사는 “연대와 협력의 힘은 참여 인원수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라 기하급수적으로 커진다는 걸 느꼈다”고 말했다. 이들을 서면으로 인터뷰한 후 6일 만났다.

2008년 호주제가 폐지되면서 민법 개정안에 “부모가 혼인신고시 모의 성과 본을 따르기로 협의한 경우에는 모의 성과 본을 따른다”는 ‘선택지’를 만들었지만 모의 성을 따르기 위해서는 혼인신고서에 별도로 체크해야 하고 부의 성을 따를 땐 받지 않는 협의서를 제출해야 한다. 아이가 태어날 때가 아니라 혼인신고 때 아이의 성을 결정해야 하는 점, 모의 성을 따를 때만 혼인신고서에 별도로 체크해야 하는 점, 부의 성을 따를 땐 받지 않는 협의서를 모의 성을 따를 때만 받는 점 등이 문제로 제기돼왔다. ‘기본값’이 부성으로 돼 있다 보니 혼인신고 때 엄마 성을 따르겠다며 협의서를 제출하는 경우는 1000건 가운데 2~3건에 불과하다.

김윤진 변호사는 “모의 성을 따른다고 하면 국가가 ‘정말로 엄마 성을 물려준다고?’라고 묻는 느낌”이라며 “실제 모의 성을 따르면 유난이라는 시선을 받게 되는데 이러한 차별적 인식이 강하니 모의 성·본을 따르는 사례가 적어지고, 사례가 적으니 차별적 인식이 변하지 않는 악순환이 지속된다”고 말했다. 공익소송 전담 변호사로 일하고 있는 김 변호사는 아버지와 사이가 좋은 편이지만 남은 인생은 어머니 성으로 살아보고 싶다고 생각한다. 청구서 제출은 고민 중이지만 이번 프로젝트에 참여해 함께 청구서를 작성할 계획이다.

지난해 12월 시작한 ‘엄마 성 빛내기’ 프로젝트에서 성본 변경 청구서 작성 자문을 맡은 김윤진 변호사가 6일 서울 동작구 서울여성프라자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문재원 기자

지난해 12월 시작한 ‘엄마 성 빛내기’ 프로젝트에서 성본 변경 청구서 작성 자문을 맡은 김윤진 변호사가 6일 서울 동작구 서울여성프라자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문재원 기자

범유경 변호사는 2015년 기준 전국에 3826명 정도 있는 희성을 쓴다. 어릴 땐 별명에 시달리기도 하고 좀 크고 나서는 성 때문에 너무 쉽게 신원이 특정돼 곤란하기도 했던 범 변호사는 “금성 범씨 아버지 아래에서 태어나 ‘전국 유일의 범유경 변호사’가 되어 버려 어디 숨지도 못한다”며 웃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 성을 물려받아 그 성·본 족보에 이름이 올라가고 그 성·본을 ‘친가’라고 부르는 ‘성씨’란 뭘까 생각을 많이 했다”며 “크고 나서야 세상에 태어나게 하고 키워준 또 한 사람인 어머니의 성씨에는 소속감이나 유대감을 느낄 기회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고 말했다. 범 변호사에게 이 프로젝트는 “어렸을 때부터 줄곧 가지고 있었던 ‘성씨가 대체 뭐길래?’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는 기회”였다.

변호사들은 직접 사건을 수임하진 않고 성·본 변경 청구서에 대한 의견을 주는 방식으로 무료 자문을 한다. 변호사들은 몇 주간 성·본변경 청구를 하는 방법에 대한 자료집을 만들고 세미나를 준비했다. 최나빈 변호사는 “부성우선주의에 대한 문제의식을 느끼고 성평등 사회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실제 ‘청구’라는 행동을 하는 당사자들의 진심이 청구서에 담길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려 한다”고 말했다.

어머니는 기여를 많이 해도 성(姓)을 줄 수 없다

법원은 주로 이혼·재혼 가정 등 ‘친부가 (자녀의 성장에) 기여하지 않은 때’에 성·본 변경 청구를 허가해 왔지만 이런 경우에도 친모의 성으로 바꾸긴 쉽지 않다. 계부와 자녀의 성이 다를 경우에는 가정의 통합에 방해되고 자녀의 복리를 저해한다며 계부의 성으로의 성·본 변경을 허용한 결정례가 많다. 반면 2018년 6월 부산가정법원은 “‘모의 성과 자녀의 성이 다른 것은 일반적’이고 ‘모가 재혼할 수도 있으므로’” 어머니 성으로의 성·본 변경을 불허했다. 김윤진 변호사는 “법원은 ‘자녀의 복리’를 판단할 때 주로 ‘아버지와 성이 다름에서 오는 불이익’, ‘아버지와 성이 같아짐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이익’을 중심으로 판단해왔다”고 말했다. 이에 따르면 이혼·재혼 가정에서도 친부는 기여하지 않아도 자기 성을 물려줄 수 있지만 어머니는 기여를 많이 해도 성을 물려줄 수 없다.

2018년 10월 원의림 변호사(가운데)가 혼인신고를 할 때 범유경 변호사(맨왼쪽)와 로스쿨 친구들은 헌법재판소 결정문을 참고해 ‘혼인 축하선언문’을 작성해 선물했다. 이 선언문 ‘판결요지’에는 “현행 민법 상의 부계성본 원칙을 타파하기 위해 사회운동, 헌법소원, 입법청원 등의 수단으로 가족관계등록법과 민법 등 관계법령 개정에 앞장서라”는 내용이 담겼다. 원의림 변호사 제공

2018년 10월 원의림 변호사(가운데)가 혼인신고를 할 때 범유경 변호사(맨왼쪽)와 로스쿨 친구들은 헌법재판소 결정문을 참고해 ‘혼인 축하선언문’을 작성해 선물했다. 이 선언문 ‘판결요지’에는 “현행 민법 상의 부계성본 원칙을 타파하기 위해 사회운동, 헌법소원, 입법청원 등의 수단으로 가족관계등록법과 민법 등 관계법령 개정에 앞장서라”는 내용이 담겼다. 원의림 변호사 제공

정부의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2018년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는 정부에 “민법에서 부계주의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는 점을 우려한다”고 밝히며 부성주의를 폐지할 것을 권고했고 2020년 법무부 산하 ‘포용적 가족문화를 위한 법제개선위원회’는 부모의 협의를 통해 자녀의 성·본을 결정할 수 있도록 법을 개정할 것을 법무부에 권고했다. 2022년 대법원은 “어머니의 성씨와 본관을 따른 자녀는 어머니 쪽 종중의 구성원이 된다”는 판단을 내놓기도 했다. 종중은 부계혈족을 전제로 구성되는 집단이었지만 대법원 판결로 종중의 정의가 달라질 수 있고 민법상 부성우선주의 원칙이 흔들릴 수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정부가 바뀌고 상황이 달라졌다. 2022년 11월 법무부는 민법의 부성 우선주의 원칙이 헌법상 기본권을 침해한 것이 아니라는 의견을 헌법재판소에 냈다. 원 변호사는 “부성우선주의는 헌법상의 기본권, 국제인권규약 등에 역행하는 제도”라고 말했다.

‘부성이 기본값’인 사회에 질문을 던지고 싶다

자문단 변호사들은 ‘부성이 기본값’인 사회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싶다고 했다. 김윤진 변호사는 “저는 아버지와 친밀하고 아버지를 사랑하며 현재 제 이름도 좋지만 그와 별개로 부의 성이 기본값인 사회는 부당하다고 느낀다”며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이러한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데 조금이나마 기여하고 싶다”고 말했다.

여전히 이런 논의를 꺼내면 “어차피 엄마 성도 외할아버지 성 아니냐”, “성이 뭐라고 유난이냐”는 반응이 따라온다. 최나빈 변호사는 “누군가에게는 모성으로 구성된 이름으로 살아가는 것이 큰 의미를 준다. 이런 이들의 생각과 그 선택이 존중받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다른 한편으로는 성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면, 모성으로 변경하는 것 역시 허용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12월 시작한 ‘엄마 성 빛내기’ 프로젝트에서 성본 변경 청구서 작성 자문을 맡은 최나빈 변호사가 6일 서울 동작구 서울여성프라자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문재원 기자

지난해 12월 시작한 ‘엄마 성 빛내기’ 프로젝트에서 성본 변경 청구서 작성 자문을 맡은 최나빈 변호사가 6일 서울 동작구 서울여성프라자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문재원 기자

김윤진 변호사는 “‘성이 정말 아무 실질이 없는 명목상 기호에 불과한지 되묻고 싶다”고 말했다. 가사소송규칙에 따르면 법원은 자녀의 성을 변경할 때 자녀와 성을 같이 하는 부모, 그가 사망했다면 성·본이 동일한 최근친 직계존속까지 ‘이해관계인’으로서 의견을 낼 수 있게 한다. 김 변호사는 “아버지가 죽었을 경우 성이 같은 직계존속의 의견을 듣게 하면서 어머니에게는 묻지 않는다. 성은 명목에 불과하지 않다는 걸 보여준다”며 “현재 우리 사회는 법적·문화적으로 ‘성을 같이 하는 것’에 분명 의미를 두고 있으면서, 왜 자녀가 ‘여성’과 성을 같이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면 ‘성이 뭐가 중요하냐’고 갑자기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처럼 구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자문단은 ‘아동의 복리’라는 관점에서도 여러 면을 살펴야 한다고 강조했다. 원 변호사는 “엄마 성을 쓴다 하면 한부모 가정으로 오해하는 시선도 있는데 엄마 성이든, 아빠 성이든 자유롭게 쓸 수 있다면 어떤 가정이든 편견의 시선이 줄어들 것”이라고 말했다. 범유경 변호사는 “아이가 크면서 정체성을 구성해가는 과정에서 엄마 성을 따를 수 있는 사회의 분위기가 조성되느냐 아니냐는 차이가 크다”며 “이 프로젝트가 장기적으로 아동이 자신의 정체성을 자유롭게 형성할 수 있다는 점에서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12월 시작한 ‘엄마 성 빛내기’ 프로젝트에서 성본 변경 청구서 작성 자문을 맡은 범유경 변호사가 6일 서울 동작구 서울여성프라자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문재원 기자

지난해 12월 시작한 ‘엄마 성 빛내기’ 프로젝트에서 성본 변경 청구서 작성 자문을 맡은 범유경 변호사가 6일 서울 동작구 서울여성프라자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문재원 기자

부의 성, 모의 성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국가들도 있다. 덴마크·노르웨이·핀란드·스웨덴에서는 부모의 성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독일은 출생신고 때 어머니 성을 선택할 수 있고 부모의 성을 둘 다 사용할 수도 있다. 첫째 아이와 둘째 아이에게 다른 성 씨를 물려주기도 한다. 스웨덴 환경운동가 그레타 툰베리와 동생 베에타 에르만은 각각 아버지와 어머니의 성을 따르고 있다. 미국 역시 출생신고 때 성이 결정되며 주에 따라 아예 새로운 성을 사용할 수도 있다.

호주제 폐지 후 16년이 흘렀다. 이미 부성우선주의에 대한 균열을 위해 자녀에게 모의 성·본을 물려준 사람들도 있고 어머니 성·본으로 성·본변경 심판청구를 해서 인용 결정을 받은 사람들도 있다. 원 변호사는 “그분들의 존재가 법원을 설득하는 가장 큰 힘이 되리라 생각한다”며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선뜻 먼저 가신 분들께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고 말했다. 이상은 변호사는 “이번 청구를 통해 같은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재판부에, 나아가 사회에 알릴 수 있다면 큰 실익을 거둔 셈”이라며 “큰 변화는 정말 작은 균열에서부터 시작한다고 한다. 작은 균열들이 퍼져나가길 바란다”고 말했다.


▼ 임아영 젠더데스크 layknt@kh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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