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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서사 아카이브

지난 2019년 기록노동자 희정은 폐업한 회사 건물에 노동자들이 남아 싸운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휴대전화 부품 제조업체인 신영프레시젼(이하 신영)이었다. 성진씨에스(자동차 가죽시트 제조업체·이하 성진), 레이테크코리아(문구용 스티커 제조업체·이하 레이테크) 노동자들도 거리에서 싸우고 있었다. 모두 중장년 여성 생산직 노동자들이었다.

작은 회사가 문을 닫아 노동자가 생계를 잃어버린 일에 사회는 ‘어쩔 수 없다’고 했다. 기업을 굴러가게 했던 노동자들에 대한 이야기는 온데간데 없고 회사와 사장에게 동정이 쏟아졌다. “사장이 자기 회사 문 닫겠다는데 떼를 쓴다고 될 일이냐”는 말이 나왔다.

싸우는여자들기록팀 ‘또록’. 왼쪽부터 희정, 하은, 림보, 시야. 또록팀 제공

싸우는여자들기록팀 ‘또록’. 왼쪽부터 희정, 하은, 림보, 시야. 또록팀 제공

여성 노동자들에겐 ‘드센 아줌마’라는 시선이 꽂혔다. 아무도 해고를 걱정하지 않았다. “쉬어, 봉사활동이나 해”라는 말이 돌아올 뿐이었다. “그 집은 어떡하냐”며 일자리를 잃은 남성을 우려하는 목소리와는 결이 달랐다.

희정, 림보, 시야, 하은(이상 활동명)은 여성 노동자들의 싸움을 ‘또박또박 기록’하기 위해 뭉쳤다. ‘싸우는여자들기록팀 또록’을 만들었다. 림보는 청소년 노동인권 옹호 활동과 인권 교육을 해왔다. 시야는 경북 성주에서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반대 운동을 하고 있다. 하은은 장애인활동지원사로 일한다. 이들은 한국 사회에 질문을 던지고자 했다. 정말 폐업은 어쩔 수 없는 일인가.

또록은 2019년 봄부터 4~5개월 동안 성진, 신영, 레이테크 노동자들을 만났다. 노동자들의 목소리와 고민을 담은 기록물이 지난해 <회사가 사라졌다>로 나왔다. 희정, 림보, 시야, 하은을 지난 9일 줌(zoom)으로 만났다.

여성 노동자들의 싸움을 ‘또박또박 기록’하기 위해 뭉친 ‘싸우는여자들기록팀 또록’, 이들은 한국 사회에 질문을 던지고자 했다. 정말 폐업은 어쩔 수 없는 일인가. 또록팀 제공

여성 노동자들의 싸움을 ‘또박또박 기록’하기 위해 뭉친 ‘싸우는여자들기록팀 또록’, 이들은 한국 사회에 질문을 던지고자 했다. 정말 폐업은 어쩔 수 없는 일인가. 또록팀 제공

“해고는 정리해고 요건 등 부당해고로 판별할 수 있는 작은 방어막이라도 존재하는데, 페업은 어떤 방어막도 없더라고요. 폐업이나 청산은 법으로 부당성을 가리기 애매해요. 그래서 폐업해서 사람이 잘리는 일을 ‘어쩔 수 없는 일’ ‘당연한 일’로 여기게 된 거죠.” 폐업을 다룬 이유에 대해 묻자 희정이 말했다.

성진은 1999년 코오롱 계열사인 직물 제조업체 코오롱세이렌(이후 현 코오롱클로텍으로 병합)의 사내하도급으로 시작했다. 성진이 문을 열었을 때만 해도 550%였던 상여금은 해마다 깎이다 사라졌다. 수당은 5만원짜리 기술수당뿐이었다. 사장은 청소 용역업체에 지불하는 30만원을 아끼기 위해 직원들에게 화장실 청소를 시켰다. 구내 식당도 문을 닫고 직원들에겐 한 달 8만원의 식대가 주어졌다.

2018년 1월 사장은 취업규칙을 변경한다고 했다. 한 끼 3000원꼴이던 식대를 없애고 자비로 해결하라고 했다. 공휴일은 연차로 대체하라면서 생산량을 늘리라고 했다. 여성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을 만들었다. 두 달이 지나자 코오롱에서 납품 물량이 없다고 했다. 여성 노동자들은 3월 정리해고 통보를 받았다. 노동위원회의 중재로 해고 통보는 철회되지만, 5월 회사는 폐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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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은 LG전자의 1차 협력업체였다. 2017년 회사는 매출이 반토막 났다고 했다. 그해 8월 ‘조속한 경영정상화와 효율적 인력 운영’을 이유로 희망퇴직 공고를 붙였다. 사람들이 제 발로 나가지 않자 직원 160여명 중 73명을 정리해고했다. 노동자들이 서울지방노동위원회로부터 부당해고 판정을 받고 7개월 만에 복직하자 회사는 2019년 1월 ‘청산’을 통보했다. 노동자 40여명은 회사 건물에 농성장을 차렸다.

레이테크는 2013년 포장부 직원들에게 정규직에서 계약직으로 바꿔 근로계약서를 다시 쓰자고 했다. 직원들은 항의해 그해 6월 노동조합을 만들었다. 회사는 여성 노동자들을 감시하기 위해 탈의실에 CCTV까지 설치했다가 발각됐다. 2018년 회사는 포장 부서를 외주화하고 부서 직원 20여명을 영업부서에 배치했다. 2019년 포장부 직원들은 해고됐다.

세 회사는 십수년 간 일해온 중장년 여성들의 노동 가치를 인정하지 않았다. 레이테크 사장은 노동자들에게 “당신들 노동은 1000원짜리야”라고 말했다. 신영 관리자는 여성 노동자들이 주 52시간제 시행 이후 임금 보전을 요구하려 사무실을 찾아오자 “당신들은 요구해서는 안 되니 그런 거 하지 마라”고 말했다. 같은 부서 남성 직원들에겐 “연봉제로 전환해주겠다”고 했던 참이었다. 모두 같은 정규직이었다. 성진 사장은 의자 시트를 재단하는 여성 노동자들에게 “재단실은 아무나 와도 다 할 수 있다”며 무시했다.

“우리는 뭉뚱그려서 ‘공장일’이라고 말하잖아요. 이분들은 본인 일에 대한 자부심이 높아요. ‘노하우가 쌓인 전문가’라는 자부심이요. 사회에선 인정해주지 않지만 스스로 ‘커리어’라고 하는 거죠. 이제 사회에서도 인정했으면 해요.” 시야는 신영에서 일했던 김정숙씨 이야기를 꺼냈다. 김씨는 15살 때부터 제약회사 공장, 금형회사, 휴대전화 공장 등 여러 공장을 옮겨다니며 일했다. 조립된 휴대전화 부품을 검사하는 경력을 인정 받아 신영에 정규직으로 입사했다.

2018년 4월 스티커 및 견출지 제조업체 레이테크코리아 본사 사무실에서 여성노동자들이 스티커 등을 재포장하고 있다. 남지원 기자

2018년 4월 스티커 및 견출지 제조업체 레이테크코리아 본사 사무실에서 여성노동자들이 스티커 등을 재포장하고 있다. 남지원 기자

세 회사의 여성 노동자들이 하는 재단·검사·포장 등 업무는 ‘비숙련’ ‘단순’ 노동으로 분류된다. ‘누구나 와서 할 수 있다’는 인식이 팽배하다. 성진에서 가죽시트를 재단하는 한 여성 노동자는 희정에게 “가죽시트 뒷면의 바느질을 본 적 있냐”고 물었다. 희정은 책에 이렇게 썼다.

“우리는 제품이 어떤 과정을 거쳐 만들어지는지도 모른 채 손쉽게 타인의 노동에 ‘비숙련’ ‘단순’이라는 수식어를 붙인다. 매끈한 중형차의 견고함을 유지하는 것은 그런 뒷면들일 텐데, 가죽시트 뒷면의 바느질이 얼마나 반듯하게 되어 있는지 우리는 모른다. 그 반듯함을 유지하기 위해 늘 손에 힘을 주어, 아침에면 뻣뻣해진 손을 뜨거운 물에 담그고 달래야 생활이 가능하다는 사람들을, 그리고 그 노동을 모른다.”(96쪽)

희정은 “한국 사회에 중심 노동과 부차적 노동을 가르는 선들이 계속 생겨났다”며 “흔히 단순 업무, 반복 업무, 여성 노동이라 불리는 것부터 하청·외주화로 내쳐졌다”고 말했다. 그는 “책에서 계속 잊지 않으려 했던 부분이 ‘세상에 부차적 노동이란 것이 어디 있나’였다”고 말했다.

림보는 1970년대 여공들을 대하는 방식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고 했다. 그는 “70년대 여성 노동자들이 노조를 만들면 ‘나이 어리고 못 배운 여자들 데려다가 기껏 돈 벌게 해줬더니 대드는 거냐’고 했다”며 “40년이 흐르니 ‘할 일 없는 아줌마들 데려다가 일 시키고 돈 주고 했더니 노조 만들어서 대드냐’고 한다. ‘당신들은 말할 수 없다’는 방식이 그대로 작동한 것”이라고 말했다.

책에 나온 세 회사의 여성 노동자들의 이야기는 근현대 산업의 역사이기도 했다. 여성 노동자들은 10대부터 결혼·출산 이후까지 생계를 위해 일했다. 가족의 밥줄이었지만 사회는 ‘반찬값 벌이’라고 했다. 또록은 여성 노동자들이 ‘현재’ 싸우고 있다는 사실만 전하지 않았다. 이들이 어떤 삶을 거쳐 왔으며, 이들에게 각 회사가 어떤 존재인지, 싸움은 어떤 의미인지 등을 짚었다.

지난 1월 공공운수노조 LG 트윈타워분회 전감순 조합원이 서울 여의도 LG 트윈타워 앞에서 피켓을 들고 눈물을 흘리고 있다. 이석우 기자

지난 1월 공공운수노조 LG 트윈타워분회 전감순 조합원이 서울 여의도 LG 트윈타워 앞에서 피켓을 들고 눈물을 흘리고 있다. 이석우 기자

시야는 “인터뷰를 하다보니 일거리를 따라서 수없이 일자리를 옮겨 왔던 과정들이 보였다. 특히 결혼·출산·육아를 해왔던 여성이 겪는 직업 변천사를 그대로 드러냈다”며 “개인의 역사이기도 하지만 구로공단 등 한국의 산업이 어떤 과정을 통해 변화해 왔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기도 했다”고 말했다. 정해선씨는 결혼한 뒤 첫 직장이 레이테크였다. 기혼 여성이 사무직 일을 찾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정씨는 어린이집에 다니는 막내 때문에 오후 6시에 퇴근할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생산직 포장일을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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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야는 책에서 여성 노동자들의 싸움을 ‘담대해지는 순간’이라고 정의했다. “레이테크 사장이 멀쩡한 정규직 일자리를 계약직으로 돌리려고 시도하자, 사장의 나발수 위치에 서야 할 관리자급 팀장 이필자씨가 팀원에게 돌아갈 불이익을 막기 위해 계약서를 거부하고 팀원들과 노조를 만들어 대항한 순간이 그렇다. 성진 사장이 밥값도 떼고, 연차휴가도 없애는 내용으로 취업규칙을 변경하는 동의서를 받기 위해 직원들을 윽박질러 서명을 받는 동안, 단 한 사람이 끝까지 서명을 하지 않고 버텼다. 그것을 지켜보며 마음 졸이던 동료들이 노동조합을 하기로 마음먹은 순간이 바로 그 ‘담대해지는 순간’이다.”(262쪽)

그는 “늘 부당함을 당해왔지만 부당한지 모르고 살아왔던 사람들이 어느 순간 부당을 인지하고 스스로 결정해 싸웠다는 게 의미 있다”고 말했다.

또록은 각자 인터뷰한 녹취록을 공유하며 인터뷰이를 입체적으로 보려 했다. 하은은 “여성 노동자를 ‘투사’ ‘어머니’ 등 하나의 정체성에 국한해 이야기를 풀어가려 하지 않았다”고 했다. 팀원들이 모두 다른 분야에 종사한다는 점이 장점으로 작용했다. 하은은 “같은 문장도 각자 다르게 해석했다”며 “다른 3명이 제 머릿속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작업했다”고 말했다.

여성 노동자들은 또록에게 “다른 사람들도 우리처럼 싸울 수 있게 알려줄 수 있는 글을 써달라”라고 말했다. 희정은 “사실 세 곳 모두 투쟁의 결과가 ‘해피엔딩’은 아니다. 하지만 목소리를 내는 과정에서 자기만의 싸움에서 ‘연대’로 시야가 넓어지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싸움 이후에 무엇이 바뀌었냐’는 질문에 여성 노동자들은 “세상이 다르게 보인다”고 답했다. 내가 다른 사람의 일을 볼 수 있고, 다른 사람도 내 일을 볼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책이 출간된 이후에도 싸우는 여성들은 계속 생기고 있다. 고용 승계를 촉구하는 서울 여의도 LG트윈타워 청소노동자들이 대표적이다. 또록은 “싸우는 여자들에 대한 기록은 계속된다”고 했다. 시야는 “사업장에서 싸우는 사람들뿐 아니라 민중저항운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싸우는 여성들을 발굴해보자고 이야기했다”고 말했다. 희정도 “자신의 영역에서 분투를 하는 여성들을 담아볼 생각”이라고 했다.

 
탁지영 기자 g0g0@kh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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