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랫
플랫

플랫팀

여성 서사 아카이브

군대는 엄연한 ‘일터’이고 군인도 ‘노동자’다. 그러나 군내에서 성폭력 피해 신고 후 피해자는 일터로 돌아가지 못하는 일이 허다하다. 일반 직장에 비해 그 정도는 더 심각하다. 전문가들은 유독 남성중심적이며 위계가 강한 군대에서 성폭력 발생과 은폐가 더 조직적으로 이뤄지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군대에서 성폭력을 겪은 피해자들은 예나 지금이나 일터로의 복귀가 어렵다. 2011년 대대장에게 성폭력을 당한 공군 장교 A씨는 신고 당시 여성고충상담관으로부터 “장기 복무할 생각이 있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는 지난 16일 기자와 통화하며 “신고 절차가 시작되면 나도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면서 “장기 복무를 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신고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지난 13일 오전 경기 성남시 국군수도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故) 이모 중사 분향소에 이 중사를 추모하는 온라인 메시지를 모아 놓은 보드판이 놓여 있다.  권도현 기자

지난 13일 오전 경기 성남시 국군수도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故) 이모 중사 분향소에 이 중사를 추모하는 온라인 메시지를 모아 놓은 보드판이 놓여 있다. 권도현 기자

2013년 두 차례 성추행을 당한 전 해군 하사 김모씨도 “진급하고 싶고 군 생활을 계속 하고 싶었다면 얘기(신고)를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2021년 공군 이모 중사는 자신이 겪은 성폭력을 보고한 뒤 상관들의 조직적인 은폐와 회유, 전출 부서에서의 괴롭힘 등을 견디지 못하고 지난달 22일 숨진 채 발견됐다.

어느 직장에서나 직장 내 성폭력은 ‘위계’에서 시작된다. 배진경 한국여성노동자회 대표는 “직장 내 성폭력은 권력을 가진 자가 행하는 위계에 의한 폭력”이라며 “위계가 강한 직장일수록 성폭력이 더 많이 발생하고, 발생한 성폭력이 더 잘 감춰질 수 있다”고 말했다. 상명하복 체계가 중요한 군대에서 피해자와 주변인은 문제 제기에 더 어려움을 느낀다는 것이다.

남성 비율이 압도적인 군대 안의 성차별적 문화도 성폭력의 원인이다. 이소희 한국여성민우회 성폭력상담소장은 “여성을 동등한 존재, 함께 일하는 동료로 여기지 않고 ‘성적 대상’으로 보기 때문에 성폭력이 발생하는 것”이라며 “상급자의 성별 비율, 여성과 남성에게 부여되는 업무 내용 등을 두루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무관용 원칙’ 세우고도 단절되지 않는 군 성범죄
📌1년 사이 28%가 늘어난 군 성폭력, 실형 선고는 1%뿐

지난 2월 한국심리학회지에 실린 ‘여군의 군 생활 경험과 적응 과정’ 논문을 보면 여성 군인들은 소수집단으로서의 소외감과 고정된 성 역할로 인한 부당함 등을 복합적으로 겪고 있다. 전직 해군인 김씨 역시 “배치를 받으면 ‘네가 무슨 군인이야’라는 시각이 팽배했다”면서 “현장에서 여군이 들어왔다고 짜증내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말했다.

군인이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도 신고를 어렵게 만든다. 배진경 대표는 “군인이나 경찰은 노동권을 인정받지 못하는 특수집단이기 때문에 성폭력이 발생했을 때 고용노동부 진정 등 외부의 도움을 받기가 어렵다”며 “결국 국방부 양성평등위원회, 군사법원 등 군 내부에서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폐쇄적 구조”라고 설명했다. 2015년부터 2020년 6월까지 보통군사법원이 성범죄 사건에 실형을 선고한 비율(13%)은 민간법원 1심 실형 선고 비율(25%)의 절반 수준이었다. 군대 내 성폭력 피해자는 다른 직장 내 성폭력 피해자보다 문제를 해결할 수단이 적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기대가 덜할 수 밖에 없다.

서울 국방부 보통군사법원. 연합뉴스

서울 국방부 보통군사법원. 연합뉴스

성추행 발생 자체를 문제삼는 구조는 ‘2차 피해’를 만든다. 10년 전 군대 내 성폭력 피해를 당한 A씨는 “사기업에서 매출로 실적을 매기는 것처럼 군대에서는 ‘무사고’가 하나의 실적이어서 피해자가 그것을 깨뜨렸다는 인식이 크다”며 “성폭력이 발생하면 부대가 전체적으로 낙인 찍히고 피해를 입으니까 피해자를 비난하는 분위기가 된다. 전출 간 부대에서도 ‘선임 잡아먹은 나쁜 X’으로 여겨지기 십상”이라고 말했다.

📌공군 또 ‘어이없는 비행’…여군 숙소 불법촬영도 감쌌다

조직이 성폭력 문제에 대해 해결 의지를 보여야 피해자가 일터를 떠나지 않을 수 있다. 지난 2019년 한국노동연구원이 발간한 ‘직장내 성희롱·성폭력 방지를 통한 노동시장 이탈방지 효과’ 보고서를 보면, 성폭력 피해를 경험했다고 응답한 노동자 중 절반 이상(51%)이 회사를 떠나고 싶다고 답했다. 그러나 퇴사 의사가 있다고 답한 이들 10명 중 8명은 ‘직장 내 성폭력 가해자 등에 대한 엄중처벌이 이뤄지면 회사에 계속 다닐 생각이 있다’고 응답했다.

피해자를 ‘문제를 만든 사람’이 아닌 ‘용기있는 사람’으로 보는 시각 전환이 필요한 이유다. 이 소장은 “어느 조직이나 성폭력이 발생할 수 있다”며 “사건이 발생했을 때 ‘또 시끄러운 일이 생겼다’고만 여기고 우리 조직이 해결해야 할 과제, 달라질 수 있는 기회로 보지 않는 시각이 문제”라고 말했다.


오경민 기자 5km@khan.co.kr

TOP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