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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기생충>의 봉준호 감독은 과거 한 인터뷰에서 폭염 속에 연기해야 하는 아역배우들을 보호하기 위해 일부러 돈을 더 들였다는 일화를 이야기한 적이 있다. 배우 이선균씨가 집 안에서 대화하고 아이가 집 밖에서 노는 장면을 찍어야 했는데 2018년 유례없는 폭염이 찾아왔다. 폭염에 야외 촬영은 너무 위험하다고 판단했고, 어린 배우를 보호하려 더위가 가신 뒤 따로 촬영해 합성했다. 컴퓨터 이미지 작업을 하느라 비용이 더 들었지만 아역배우 보호를 위해 감수했다고 한다.

샤프롱 양소원씨(맨 오른쪽)가 지난달 28일 서울 구로구 디큐브아트센터 연습장에서 뮤지컬 <마틸다>의 주연 배우 진연우양(맨 왼쪽)과 임하윤양(가운데)에게 물을 건네고 있다. 신시컴퍼니 제공

샤프롱 양소원씨(맨 오른쪽)가 지난달 28일 서울 구로구 디큐브아트센터 연습장에서 뮤지컬 <마틸다>의 주연 배우 진연우양(맨 왼쪽)과 임하윤양(가운데)에게 물을 건네고 있다. 신시컴퍼니 제공

K팝을 비롯해 K드라마, 영화가 해외 무대에서 잇따라 상을 받고 각종 기록을 쌓아가고 있다. 대외적으로는 박수 갈채가 넘쳐나지만 한국의 대중문화예술 촬영장과 공연장에서 아동·청소년의 인권은 화려한 조명에 쉽게 가려진다. <기생충>의 ‘아역배우’ 보호 일화는 일부 제작진의 ‘선의’에 기댄 에피소드에 불과하다. 촬영장과 공연장에서 제기되는 아동·청소년 인권침해 문제는 어제오늘 일이 아닌데도 여전히 이들을 보호할 법적 울타리는 유명무실하다. 아동·청소년 연기자들을 위해 ‘샤프롱(chaperon)’ 제도를 도입한 공연 사례와 법적 개선점들을 짚어본다.

아동·청소년 배우의 든든한 조력자 샤프롱

샤프롱(chaperon)은 프랑스어로 과거 젊은 여성이 사교장에 나갈 때 보살펴 주는 사람을 의미한다. 촬영·공연장에서 아역배우를 보호하는 전담 직원으로 현재는 공연계에서 주로 활용한다.



유치원 선생님 같은 ‘샤프롱’


뮤지컬 <마틸다>의 첫 공연을 일주일가량 앞둔 지난달 28일 서울 구로구 디큐브아트센터. 주인공 마틸다 역할을 맡은 진연우양(10)이 연습장에 도착하자마자 마주하는 사람은 ‘샤프롱’ 양소원씨(26)다. 배우들이 도착할 즈음 샤프롱 양씨는 연습장 입구부터 나와 있었고, 연우양과 함께 꽤나 무거워 보이는 저녁 도시락통도 넘겨받았다. 곧이어 임하윤양(8)도 엄마와 같이 도착했다. 오자마자 하윤양은 ‘선생님’을 와락 껴안았다. 하윤양은 “우린 껌딱지”라면서 ‘선생님’과 손을 잡고 어깨동무를 하며 연습장으로 들어갔다.

아이들에게 ‘선생님’으로 불리는 양씨는 연습장에 들어가 아역배우들과 함께 그날의 컨디션을 점검하고 이날 연습할 <마틸다>의 대본을 다시 한번 들여다보게 했다. 무대에 올라가기 전 목 상태는 괜찮은지 확인하고 물도 준비했다.

연우양은 이번이 여섯번째 공연이다. 이전 공연에서는 샤프롱이 없었다. 공연 연습장에 부모가 들어올 수 없기 때문에 연우양은 어린 나이에 홀로 연습장에서 어른 배우들과 연출진을 마주해야 했다. 그는 “어른 배우분들이 챙겨주시긴 했지만 그분들도 배우이기 때문에 자기 역할에 신경을 쓰셔야 했다”면서 “지금은 샤프롱 선생님이 집중적으로 돌봐주시니까 마음이 편하다”고 말했다. 연우양은 샤프롱 양씨를 “유치원 선생님 같다”고도 표현했다.

하윤양에게 <마틸다>는 첫번째 뮤지컬 공연이다. 하윤양은 처음 ‘퀵체인지’(다음 장면을 위해 무대 뒤에서 빠르게 옷을 갈아입는 것)를 해야 하는 장면에서 동선을 헷갈렸다. 그때 양씨가 재빠르게 제대로 된 방향을 알려줬다. 하윤양은 “아직 서툰데 샤프롱 선생님이 친절하게 알려주셔서 저한테는 꼭 필요한 존재”라면서 “제 편이 한 명 더 생겨 든든한 느낌”이라고 말했다.

샤프롱 양소원씨(왼쪽)가 지난달 28일 서울 구로구 디큐브아트센터 무대 뒷편에서 뮤지컬 <마틸다>의 주연 배우 진연우양의 마이크를 확인하고 있다.  신시컴퍼니 제공

샤프롱 양소원씨(왼쪽)가 지난달 28일 서울 구로구 디큐브아트센터 무대 뒷편에서 뮤지컬 <마틸다>의 주연 배우 진연우양의 마이크를 확인하고 있다. 신시컴퍼니 제공

양씨는 주인공 마틸다 배우 4명의 샤프롱이다. 그는 “스케줄 관리하고 아역배우들 컨디션과 기분을 체크하는 일이 제일 중요하다”면서 “무대 오르기 전 마이크를 채워주고 동선을 일러주기도 한다”고 말했다. 양씨는 “한번은 배우가 자신이 없어해 감독님께 ‘배우가 시간이 필요하다’고 의견을 전달하고 휴식시간을 갖게 한 적도 있다”고 전했다. 지난 6월부터 샤프롱 일을 시작한 그는 “아이들과 이 일을 하면 할수록 공연에 더욱더 샤프롱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고 덧붙였다. 연습을 하느라 학교 수업을 빠져야 하는 아이들을 위해 때론 ‘체험학습 신청서’ 제출에 필요한 사진을 찍어주는 것도 그의 일 중 하나다.

마틸다 역 4명을 포함해 이 뮤지컬에는 총 20명의 아동이 출연한다. 샤프롱 4명이 고용된 상태다.

제작사 신시컴퍼니는 2018년 <마틸다>를 처음 국내에서 공연할 때 샤프롱 제도를 도입했다. 신시컴퍼니가 당시 샤프롱을 도입한 것은 해외 제작진의 요구가 주된 이유였다. 정소애 신시컴퍼니 기획본부장은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마틸다>는 아이들이 20명 이상 나오는 뮤지컬이었다. 처음 시작했을 때 아역배우들을 어떻게 교육시킬까 고민했다. 당시 해외 스태프는 ‘한국의 아동 관련 보호법은 어떻게 되는지’ 먼저 물어봤다. 창피한 부분이 있었다. 우리는 그런 것을 생각하지 못했다. 우리에게는 그런 법이나 제도가 없으니까.”

이때 도입된 제도가 바로 샤프롱이다. 샤프롱은 프랑스어로, 과거 젊은 여성이 사교장에 나갈 때 보살펴주는 사람을 의미했다. 지금은 촬영·공연장에서 아역배우를 돌봐주고 보호해주는 일을 하는 사람을 말한다. 영국, 미국, 캐나다, 뉴질랜드 등지에서 도입하고 있다. 영국에서는 특히 지역 당국의 허가를 받은 사람만이 샤프롱으로 활동할 수 있다. 샤프롱은 주로 배우들의 동선 관리, 멘털 케어 등 연기를 위한 부분에 큰 도움을 주지만, 아이들의 식사, 휴식, 간식, 대기 시간에 학습을 도와주거나 숙제를 챙겨줄 뿐 아니라 투약 등까지도 맡는다. 샤프롱은 문제가 생겼을 때 제작진과 부모, 아동·청소년 배우들과의 소통 창구도 된다.

법의 울타리는 언제쯤

국내에서 샤프롱 제도를 택하고 있는 분야는 아직까지 아이들이 주인공으로 많이 출연하는 공연계 정도이다. 그것도 일부 제작사들의 ‘선의’에만 기대고 있다.

배우 허정도씨는 2018년 한겨레 기고에서 노동시간 제한이 없고 너무 덥거나 추운 날씨에도 아동·청소년 배우들이 수시간을 대기해야 하는 방송 촬영 현장의 인권 문제를 제기했다. 공개적으로 목소리를 낸 지 4년이 지났다. 달라진 게 있을까. 그는 지난달 22일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에서 열린 간담회에서 “촬영장에서의 노동시간 개념이 생긴 뒤로 드라마 현장에서 일단 폭력의 절대량이 줄었다”면서도 “인식이 바뀌고 있는 것은 큰 변화이지만 그래도 여전히 (아동 인권이) 방치되는 모습이 있다”고 말했다.

문제는 여전히 법의 변화가 없다는 점이다. 일부 제작진의 선의에만 기댈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는 “아역배우들은 ‘참는 게 덕목이다. 그게 살아남기 위한 조건이다’라는 교육을 받아왔기 때문에 (그들 스스로) 이야기를 하기 어렵다”면서 “아이들에게 어떤 권리가 있고, 어른들은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현장에서 요구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또 “법의 울타리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국가인권위원회가 2020년 12월 진행한 ‘대중문화산업 종사 아동·청소년 인권 상황 실태조사’를 보면, 아동·청소년 대중문화예술인 78명 중 촬영기간 동안 하루 평균 수면시간이 ‘4~6시간’이라고 응답한 비율은 절반이 넘었다(57.7%·45명). 촬영기간 중 신체적으로 아프거나 다쳤던 경험이 있다는 비율이 14.1%(11명), 촬영대기 장소가 없거나 부족하다고 응답한 비율이 23.1%(18명)로 나타났다. 인권위는 아동·청소년 예술인들의 수면권, 건강권, 학습권 등이 지켜지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샤프롱 양소원씨(맨 왼쪽)가 지난달 28일 서울 구로구 디큐브아트센터 연습장 입구에서 뮤지컬 <마틸다>의 주연 배우 임하윤양(가운데)의 어머니에게서 도시락을 건네받고 있다.  신시컴퍼니 제공

샤프롱 양소원씨(맨 왼쪽)가 지난달 28일 서울 구로구 디큐브아트센터 연습장 입구에서 뮤지컬 <마틸다>의 주연 배우 임하윤양(가운데)의 어머니에게서 도시락을 건네받고 있다. 신시컴퍼니 제공

현재 대중문화예술계에 있는 아동·청소년의 법적 울타리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모호’하다. 현행 ‘대중문화예술산업발전법’에는 19세 미만의 아동·청소년을 15세 기준으로만 나누고 있다. 미취학 6세 배우와 14세 청소년 배우의 경우 발달 단계가 다른데도 똑같은 노동시간을 적용받고 있는 것이다. 아동·청소년의 수면권, 건강권, 학습권 등을 보장해야 한다고 법에 명시되어 있기는 하지만 구체성은 떨어진다. 어떻게 보장해야 할지 또는 이를 위반했을 때 어떠한 제재가 있는지 등은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다.

김두나 ‘희망을 만드는 법’ 변호사는 “기존 대중문화예술발전법에는 아동·청소년 보호 조항이 추상적·선언적 수준으로만 쓰여 있고 관리감독도 유명무실하다”며 “기본권 보장을 구체화하는 조항들이 들어가야 한다”고 지적했다.

지난 5월 유정주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이 같은 요구들을 담아 ‘대중문화예술산업발전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12세 미만의 경우 일주일에 25시간, 하루 6시간을 초과해 촬영할 수 없으며, 12세 이상 15세 미만은 일주일에 30시간, 하루에 7시간으로 세부적으로 나눴다. 이 법안은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법안심사소위원회에 계류 중이다.

대중문화예술산업발전법 개정안 주요 내용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청소년 대중문화예술인이 신체적·정신적 건강, 학습권, 인격권, 수면권 등 기본적 인권을 보장받고 있는지 감독하기 위해 청소년인권보호관을 배치할 수 있다”

“12세 미만은 1주일에 25시간, 1일에 6시간, 12세 이상 15세 미만은 1주일에 30시간, 1일에 7시간을 초과해 촬영할 수 없다”

<자료: 유정주 더불어민주당 의원 발의안>



개정안에서 눈에 띄는 대목은 ‘청소년 인권 보호관’을 신설해 촬영장 또는 공연장에 배치할 수 있도록 한 점이다. 청소년 인권 보호관은 뮤지컬계에서 도입 중인 샤프롱 제도를 의미한다. 의무조항이 아닌 ‘청소년 인권 보호관을 배치할 수 있다’는 문구로 포함됐다. 도입 초기라는 점을 감안해 의무조항으로 두지 않았다고 한다. 의무조항이 아니라면 청소년 인권 보호관을 뮤지컬과 같은 공연계 이외에 방송 촬영 현장에서 도입할지 의문이 제기되는 것도 사실이다. 새로 사람을 채용해야 하니 결국 인력과 비용 이야기가 나올 수밖에 없다. 프로그램 제작사와 방송을 내보내는 방송사가 다르기 때문에 청소년 인권 보호관의 고용 주체가 누가 될지도 논란 지점이다.

방송 촬영 현장을 잘 아는 배우 허정도씨는 ‘독립’과 ‘전담’이라는 필수조건을 제시했다. 그는 “제작사가 샤프롱(청소년 인권 보호관)을 고용한다면 워낙 바쁘게 돌아가는 촬영 현장에서 브레이크를 걸고 의견을 제시하기 힘들다”면서 “샤프롱은 독립적이어야 하고 다른 일과 겸하지 않고 전담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샤프롱을 고용하기 위해 국가가 비용을 부담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인권위 ‘대중문화산업 종사 아동·청소년 인권 상황 실태조사’의 연구자였던 이종임 문화연대 집행위원은 “아동·청소년 예술인들은 본인이 힘들다는 걸 알면서도 시스템이 그렇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자조적인 뉘앙스의 이야기를 많이 한다”며 “그래서 더더욱 제도적 보완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그는 “대중문화 향유에는 즐거움과 함께 책임이 따른다”면서 “샤프롱을 고용하는 비용은 불필요한 지출이라는 인식이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임지선기자 vision@kh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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