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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서사 아카이브

계획보다 추억담이 많아진다. 나이 탓일 게다. 남다른 포부나 원대한 꿈을 가져본 적 없는 평범한 인생이 하루하루 저물어가지만, 그럼에도 종종 장래희망이라며 이야기하는 것이 하나 있다. 65세쯤 되어 세상에 의미 있는 역할을 해보고 싶다는 꿈이다. 의외의 꿈에 사람들은 묻는다. 왜 65세냐고.

딱히 이유는 없다. 그저 살아온 경험 속에서 그 나이쯤 되어야 인생을 알 것 같아서다. 물론 그간에도 지식과 기술, 사회적 역할이 있었지만 쉼없이 공부해도 여전히 삶은 어렵고 생각과 행동엔 늘 아쉬움이 남는다. 하지만 65세 무렵쯤엔 스스로를 조금은 인정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며 나름의 노력을 이어가고 있다. 진도 범위를 체크하는 수험생 같은 마음이랄까.

그래픽|이아름 기자

그래픽|이아름 기자

안타까운 것은 나이듦에 대한 개인적 선망과는 달리 롤모델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현실에서 사회적 활동의 기회는 60세 전후로 멈춘다. 수명연장과 사회변화에 따른 실버세대의 정체성을 논하는 미디어는 세련된 외모와 건강 가꾸기, 취미생활 같은 윤택한 노년의 삶에 포커스를 맞춘다. “돌아보니 인생의 황금기가 60세에서 75세였다”는 100세 철학자 김형석 교수의 이야기가 희망에 힘을 실어주긴 했지만, 모든 면에서 최상에 가까운 삶이라 다소 멀게 느껴진다. 현실 세계의 노인들은 과하게 희생적이거나 고집 불통에 가까워 배타적이고 불편한 대상이 된 지 오래다. 환경에 따른 지적·정서적 격차가 크다. 좋은 어른들은 많지만 세월에 걸맞은 시야와 지혜, 깊이와 배려, 더 나은 자신과 사회를 위한 노력을 보여주는 노년 모델은 흔치 않다.

부담스럽게 위대하지 않은 롤모델에 대한 갈증 속에 찾아낸 이는 미스 마플이었다. 애거사 크리스티 추리소설의 주인공이다. 몇년 전 남녀 심리탐구에 대한 책을 쓰며 던진 궁극적 질문은 남녀를 넘어 더 나은 인간으로 살아가는 방식이 무엇인가였고, 마플은 그런 물음 속에서 발견한 괜찮은 노년의 인물상으로 책의 말미에 등장했다.

마플은 영국 시골마을에 사는 평범한 노인이지만 결코 평범하지 않다. 나이 들며 잃어버리거나 느슨해지는 많은 것들을 간직하고 있어서다. 자신의 의견에 당당하면서도 열린 귀를 가져서 독거 노인이지만 친구도 다양하다. 인간의 유약함을 잘 이해하기에 무조건 인간을 믿지 않지만, 같은 이유로 연민과 공감 능력도 출중하다. 무엇보다 그를 사랑하는 이유는 일면 냉정하고 까칠해 보이지만, 그 이유가 관계의 선을 분명히 아는 지혜에서 출발한다는 점이다. 적절한 거리를 아는 이들이 갖는 통찰력이 그를 명탐정으로 만드는 열쇠다.

최근 미스 마플과 비슷한 여성이 화제가 되고 있다. 윤여정씨다. 75세의 이 노년 배우 역시 꽤나 까칠하고 솔직하기로 소문나 있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이 좋아하는 이유는 마플의 미덕과 상당히 유사해 보인다. 자신과 세상에 대한 명철한 이해력과 경계를 아는 지성, 지속적인 자가발전의 노력이다. 멋지게 나이 들어가는 인생 모델로서 지대한 관심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윤여정 배우의 수상에 대한 국가적 관심과 흥분으로 가려졌으나 올해 오스카는 노년 파워가 상당했다.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프랜시스 맥도먼드는 1957년생으로 65세다. 여우조연상을 두고 경합한 글렌 클로스는 윤 배우와 같은 75세다.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앤서니 홉킨스는 1937년생으로 85세다. 명배우들의 열정 이상으로, 함축된 세월의 역량들이 분출할 수 있는 미국 문화계의 토양에 부러움이 앞선다. 작년 오스카에서 봉준호 감독이 80세를 넘은 마틴 스코세이지에게 바친 헌사에는 자신의 미래에 대한 희망도 담겨있었을 것이다.

백세시대. 살아온 날만큼을 다시 살아가야 할 중년의 나이. 분야도, 숫자도 한정적이긴 하지만 등불 같은 이들을 만나는 기쁨과 안도감이 자못 크다.


박선화 한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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