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삼대

최종렬 계명대 교수·사회학

나는 여러 해 전부터 지역여성의 삶을 사회학적으로 탐구하고 있다. 시작은 지역청년의 삶이다. 특유의 ‘성찰적 겸연쩍음’과 ‘적당주의 집단 스타일’을 발견했다. 패배할까 두려워 집 밖에 나가 경쟁에 뛰어들지 않지만, 시도조차 하지 않는 자신이 겸연쩍기는 하다. 암기능력 테스트에 좌절한 경험을 나누어 가졌기에 상처가 덧나지 않도록 서로 낮은 기대를 주고받고 모든 상황에 적당하게 관여하며 그 상황이 어떻게 펼쳐지든 별다른 말을 하지 않는다.

최종렬 계명대 교수·사회학

최종렬 계명대 교수·사회학

이런 에토스를 심어준 부모가 궁금해 다시 연구에 뛰어들었다. 부모 세대 특유의 ‘보수주의적 가족주의’와 마주쳤다. 가부장 폭력에 기죽어 제대로 된 소통 한번 못하고 이미 태곳적부터 정해진 듯한 남자의 길과 여자의 길을 아무 의심 없이 걸어왔다. 그 길이 죽을 만큼 고통스러웠지만 그렇게 살아보니 이제 ‘성찰적 자신감’과 ‘성실주의 집단 스타일’을 갖게 되었다. 자녀도 무탈하게 잘 크고 여태 남에게 손 안 벌리고 살았기에 나름 자신감이 넘친다. 집 밖 세상과 담쌓고 성실하게 몸을 낮추어 말없이 살아가니 가족 모두 행복하다.

새로운 의문이 솟구쳤다. 어떻게 하다 세상 밖에 대해 알려고 하지 않고 내 가족의 행복만을 추구하는 삶을 살게 되었을까? 할머니의 삶부터 캐보았다. 이야기를 듣는데 미숫가루 얹힌 듯 가슴이 답답하고 미어졌다. 논문을 쓰려다 소설로 방향을 틀었다. 느낌을 나누어야 화병에 걸리지 않는다. 인터뷰 자료 더미를 초집중해서 파헤치자 괴물 같은 ‘가족 콤플렉스’가 어슴푸레 형체를 드러냈다. 경제적으로 무능한데도 막강한 전통적 부권을 지닌 가부장을 대신해 가부장 친족 연결망을 지탱해온 할머니. 뒤틀린 부권에 대한 반발로 집 밖으로 뛰쳐나가 맘껏 에로티시즘을 즐기며 망나니짓을 일삼은 아버지. 평생 집 안에 갇혀 돌봄과 재생산 노동하느라 에로티시즘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몰성적 사물이 된 엄마. 어린 시절 돌봄 공백 속에 어려움을 겪었음에도 출세 공부를 통해 가부장 사회의 주류가 되어 뒤늦게 엄마를 숭고화하는 아들. 집 밖으로 나갔다가 극악한 가부장 제도에 좌절하고 도망치듯 결혼해서 숭고한 엄마의 도덕을 따라 내 가족만의 생존과 보존을 위해 살아가는 딸.

살부(殺父)! 프로이트가 <문명 속의 불만>을 펴낸 이후로 새로운 시대는 아버지를 죽이면서 시작되는 것으로 그려져왔다. 한국 현대사에는 죽일 아버지가 따로 없었다. 이미 상징적으로 거세되어 권위를 휘두를 수 없는 무력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물리적 폭력을 행사하면서도 이를 상징적으로 정당화할 능력이 없는 아버지! 상징적 아버지의 부재는 한국 현대문학에 수도 없이 반복해서 형상화된 주제였다. 이러한 형상화 뒤에는 숨은 그림자처럼 항상 집을 지키고 있는 숭고한 엄마가 있다. 이 엄마 덕분에 그나마 집이 풍비박산 나지 않고 유지되었다. 대가는 너무 처참하다. “나처럼 살지 마.” 엄마가 딸에게 거듭 당부하지만, 딸이 다시 그 숭고의 길로 걸어 들어가면서 할머니-엄마-딸의 ‘시스템 복제’가 반복되고 있다. 여성 삼대의 연결고리를 끊으려면 살모(殺母)가 필요하다.

계약한 출판사에 원고를 보냈다. 웬걸, 출판을 꺼렸다. 페미니즘과 다른 목소리라 요즘 출판계 흐름과 어긋난다. 부담을 주기 싫어 계약을 해지하고 다른 출판사에 원고를 넘겼다. 그곳도 마찬가지. 이후 접촉한 출판사의 반응이 한결같았다. 한 여성 출판인은 시대에 뒤처진 상투적인 여성 인물에 화가 치밀고 가모장 탓하는 남성의 이기심에 역겨움마저 든다며 분통을 터트렸다. 고통스러워도 여성 삼대의 시스템 복제를 정면으로 마주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소용없었다. 묻고 싶다. 온 사회가 지금 같은 ‘정상가족’으로는 살 수 없다고 아우성치는데, 정작 그 ‘문제의 집’을 해부하는 사회학자의 글은 왜 세상에 나올 수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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