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 공화국

오찬호 <세상이 좋아지지 않았다고 말한 적 없다> 저자

박사학위를 취득하려면 논문 통과만이 아니라 학술지 논문 게재 실적이 있고 영어와 제2외국어 시험에 합격해야 했다. 성가시게 했던 건 제2외국어였다. 다른 건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거였지만 고등학교 이후 작별했던 생소한 언어를, 그것도 ‘시험용’으로 공부해야 하는 스트레스는 어마했다. 나는 독일어를 선택했는데 두 번이나 떨어지고 나서야 턱걸이로 통과했다. 간절했으니 얼마나 기뻤을까. 합격이란 문자를 보고 만세를 불렀던 기억이 선명하다.

오찬호 <세상이 좋아지지 않았다고 말한 적 없다> 저자

오찬호 <세상이 좋아지지 않았다고 말한 적 없다> 저자

이 비생산적인 과정은 4~5년이 지나서 사라졌는데 내가 장난스럽게 으쓱된 것도 그때 즈음이었다. 논문을 작성 중인 사람을 만나거나 대학원 후배들을 볼 때면 매번 “나는 독일어 시험도 쳤어!”라면서 우스갯소리를 하곤 했다. 한심한데, 시험이란 그렇다. 도대체 이게 왜 필요한지는 납득이 되지 않아도,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되니까 해야 한다. 그래서 공부가 아니라 답을 골라내는 직관과 오답의 함정에 빠지지 않을 요령만을 체득한다. 이 효율성에 적응할수록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자괴감이 들기도 하지만, 합격의 순간 모든 건 긍정적으로 승화된다. 노력에 대한 정당한 보상을 받았다는 우쭐함과 관문을 정의롭게 통과했다는 오만함까지, 이 엄청난 감정들을 단지 시험에 합격했다는 사실 하나가 정당화한다.

시험만이 공정이라는 야당의 대표는 대변인을 ‘배틀’로 뽑고 선거 공천에 필기시험 합격이라는 자격조건을 내걸었다.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반대한다는 정규직들은 ‘공부하는’ 퍼포먼스를 시위랍시고 선보인다. 시험이 곧 도덕이고 윤리라는 발상이다. 열악한 노동환경에서 허우적거리는 사람들이 모욕감을 느끼는 건 안중에 없다. 청와대가 젊은 여성을 청년비서관으로 선발하자, ‘시험도 안 친 주제에’ 1급 공무원이 되어 거액의 연봉을 받는다는 비난이 불쑥불쑥 등장한다. 공부의 신이라고 하는 사람도, ‘갓선생’이라 불린다는 공무원 시험 강사도 시험을 준비하는 이들의 박탈감을 근거 삼아 그 ‘정치행위’는 불공정하다고 열을 올린다. 이게 또 언론에서 바른 소리랍시고 보도된다. 이 정도면 그냥 시험공화국 국민이다. 정치의 맥락 따윈 안드로메다에 던져버리고 청와대를 ‘보수 좋은’ 공기업으로 이해하고 있으니 말이다.

시험만 외치는 작금의 상황은, 사람이 시험에 몰두할수록 세상을 납작하게 바라보고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시험은, 시험과 관련 없는 것을 철저히 자신의 삶에서 배제시키게끔 한다. 대표적으로 정치와 사회는 단칼에 단절되어야 할 영역이다. 시험과 무관하면 무용한 것이라 일단 믿어야지만 100분에 100문제를 풀어야 하는 9급 공무원 시험 준비가 가능하다. 열심히 공부할수록, 세상을 읽는 눈은 빈약해진다. 바늘구멍을 통과하기 위한 경쟁이 두꺼워지고 그 시기가 길어지면 역설적으로, 바늘구멍을 개선하자는 정치를 불신하고 구멍 이외의 사회를 상상하는 걸 금지한다.

시험을 통과한 이들의 성과와 통과하려는 이들의 의지를 존중한다. 불평등한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는 개인의 합리적인 선택이었을 거다. 하지만 그게 유일한 사회적 해법이 되어서야 되겠는가. 이러다가 아파트 분양도, 유치원 배정도 시험으로 할 판이다. 들어가기 어렵다는 호스피스 병동도 사전에 시험에 합격한 이들에게 우선권을 주면, 공정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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