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 공신력? BBC에 물어봐

매년 여름이 되면 축구선수들이 이리저리 팀을 옮기는 이적시장이 열린다. 국제축구연맹(FIFA)은 여름과 겨울에 한해서만 어떤 구단에 소속된 선수가 다른 구단에 등록하도록 제한하고 있는데, 이 가운데 유럽축구 시즌 종료 뒤인 여름에는 말 그대로 대격변이 일어나곤 한다. 올해도 이적시장은 여지없이 뜨겁다. 유럽에서 열 손가락에 꼽을 만한 선수들이 팀을 이미 옮겼거나 곧 옮길 것이라는 전망으로 떠들썩한 하루가 이어지고 있다.

강남규 문화사회연구소 연구위원

강남규 문화사회연구소 연구위원

이적시장의 시작을 알리는 총성은 언론으로부터 온다. 온 유럽의 언론들이 선수 이적에 관한 온갖 루머를 보도하기 시작한다. 대부분의 기사는 거짓 기사나 추측성 기사 혹은 미확정 사실로 판명난다. 구단들끼리 혹은 구단과 선수 사이에서 치열한 눈치게임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협상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역정보를 흘리는 것이다. 소셜미디어 시대에는 심지어 어떤 선수가 다른 구단 선수의 게시물에 ‘좋아요’를 눌렀다고 이적설이 제기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이처럼 대부분의 기사들이 함량 미달이지만, 이적시장에 대한 팬들의 엄청난 관심 덕분에 이런 기사들은 독자들의 클릭을 능히 이끌어낸다.

이렇다보니 팬들은 언론보도에 대비되는 개념으로 ‘오피셜’이라는 개념을 도입했는데, 구단이나 선수가 직접 발표한 ‘공식적인 사실’을 뜻한다. 달리 말하면 언론은 추측이나 미확정 사실을 기사화하는 못 믿을 대상이라는 얘기다. 그런데 거의 유일하게 예외적으로 신뢰받는 매체가 있으니, 바로 영국 공영방송사인 BBC다. 국내의 유럽축구 팬들은 ‘비피셜’이라는 말을 쓰는데, BBC와 오피셜을 조합한 말이다. 다른 언론들은 대체로 틀린 정보를 기사화하지만 BBC가 보도하면 그건 높은 확률로 공식적인 사실이라는 팬들의 경험적 신뢰에서 나온 말이다. 실제로 BBC가 어떤 선수의 이적이 확정됐다고 보도하면 며칠 안에 ‘오피셜’이 뒤따른다.

BBC의 공신력이 어디서부터 나오는지를 이야기하기 위해 BBC의 운영방식이나 혁신전략 따위를 늘어놓는 것은 불필요한 일이다. 별다른 비결이 있어서가 아니라 BBC가 단지 언론으로서 원칙을 고수했을 뿐이기 때문이다. 선수의 소셜미디어를 근거로 추측기사를 쓰지 않고, 특종사냥을 위해 무리한 기사를 쓰지 않으며, 다른 언론의 근거가 빈약한 기사를 섣불리 인용하지 않는다. 사실로 확정될 가능성이 절대적으로 높아졌을 때 비로소 보도한다. 그러니 BBC는 잘 틀리지 않고, 보도 후 며칠 만에 오피셜이 나오는 것이다. 대단한 특종을 내는 것도 아니고 막바지에 신중하게 보도를 낼 뿐이지만, 결과적으로 BBC는 ‘공신력 끝판왕’으로 존중받는다.

지난 8일 폐회한 도쿄 올림픽에서 우리는 공영방송 MBC의 중계 참사를 목격했다. 개회식에서 참가국들을 부적절하게 소개한 사건이나 남자 축구 예선에서 자책골을 넣은 상대 선수를 자막으로 조롱한 사건은 ‘공영방송의 현주소’로 조명됐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혹자는 MBC에 일베 유저가 침투해서 그렇다는 식으로 해석하지만, 그보다는 종편 등장으로 인한 경쟁 심화나 유튜브·OTT의 부상에 따른 위기의식 확대로 해석하는 말들에 좀 더 납득이 된다. 살아남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공영방송으로서의 윤리를 저 멀리 내다버리고 요즘 뜬다는 유튜브 문법을 무분별하게 방송에 이식한 결과라는 얘기다.

BBC는 단지 기본적인 원칙을 따름으로써 공신력을 인정받고 공영방송으로 존중받을 수 있었다. 반면 기본적으로 해야 할 것들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새로운 시도’로만 기회를 엿보는 기획들은 MBC의 경우처럼 곧잘 실패하게 된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한다. 혁신이니 변화니 하는 것은 탄탄한 기본 위에 쌓아올릴 때 유효한 것이지, 기본이 무너진 잔재 위에 대강 쌓아올려서 될 일은 아닌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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