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철, 도시락의 아련한 기억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장마가 올해는 제법 오는 모양이다. 장마전선이라는 말에 귀를 곤두세우고 뉴스를 듣던 때가 있었다. 실내 생활이 많은 요즘과 달리 과거는 바깥 생활이 흔했다. 날씨는 삶에 큰 영향을 끼쳤다. 바깥 채비가 큰일이었다. 도보 생활자들이 거의 전부이던 시절이었다. 살 부러진 대나무 비닐우산, 우산을 수리하던 동네 가게와 작은 개천이 범람하던 장마철의 기억. 우산을 잃어버리면 세상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우산 살 돈이 없어 비를 쫄딱 맞고 귀가하던 사연도 다들 있으리라.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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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이 그런지 몰라도 그 시절은 장마철도 참 길었다. 허름한 집 벽에 곰팡이가 피어야 장마가 끝나고 더위가 시작됐다. 장마철이 되고 보니, 옛날 엄마들은 뭘 식구들에게 먹였을까 싶다. 호박 칼국수에 된장찌개, 미역 넣은 오이냉국, 그것도 없으면 마른멸치에 고추장과 풋고추에 된장을 찍어 보리밥이나 통일쌀 유신쌀밥을 넘겼다. 강된장에 호박잎 쌈도 먹었던 것 같다. 그때 아이들은 매운 풋고추를 척척 먹었다. 가릴 처지가 아니었으니, 주는 건 다 먹었다.

학교에 가서 가방을 열면 젖어 있던 교과서며 공책에 울상을 짓고, 도시락 반찬이 쉬어서 낭패를 보곤 했다. 여름 도시락 반찬으로 엄마는 뭘 넣어주셨지. 알감자조림이며, 열무김치에 어묵볶음에 찐득한 멸치볶음과 운이 좋은 날에는 소시지볶음도 있었겠지. 우리에겐 돌아가지 못하는 시절이 있다.

식당 부엌에 앉아 있으면 음식 재료의 변화로 계절을 읽을 수 있다. 가지가 맛이 들면 초여름이고, 오이 허리가 굵어지고 씨가 야물면 이제 초여름도 다 갔구나 싶어지는 것이다. 장마가 지고 나면 재료값도 마구 오른다. 옛날 장마에는 밭작물이 다 쓸려가고 저장해둔 건 썩고 해서 물가가 뛰었는데, 창고 좋고 시설 재배 많이 하는 요즘도 장마철은 재료비 오르는 계절이다. 볕이 적어서 작물도 덜 야물고 맛도 별로다. 고깃집에서 상추 인심이 나빠지면 장마철이라고 했는데, 요즘도 그런지 모르겠다. 그러다가 장마가 끝나면 볕이 너무 독해서 상추 같은 이파리 채소들은 웃자라서 또 마음에 안 든다. 잘 손질되고 깨끗하게 손질해서 마트에 진열되는 채소의 저 뒷사정은 결코 만만한 게 없다. 스마트농업이니 뭐니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날씨와 비와 햇살의 범주 안에서 살아간다.

장마가 끝나고 여름 음식으로 기억이 많이 나는 건 하지감자였다. 갓 수확한 포실한 감자를 쪄서 상추에 싸서 공장 고추장을 발라 먹었다. 소금 찍어 먹어도 맛있고, 그냥 삶기도 했다. 솥바닥에 눌린 감자는 꼭 검게 타곤 했는데, 그 부분에 소금 맛이 들어서 은근히 맛이 좋았다. 감자 많이 넣은 짠 된장국에 보리밥 비벼 먹는 맛을 아시는지. 미처 건져내지 않은 굵은 국멸치가 그냥 남아 있기도 했는데, 단물 다 빠진 그 멸치의 잔해도 같이 썩썩 비볐다. 그렇게 여름을 맞았다. 어쨌든 긴 장마에 다들 잘 드시고 건승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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